26. 주차장, 실외, 오후
자동차 안에서 현철이 격정적인 클래식을 듣고 있다. 민준이 운전석에 오른다.
민준:
야, 괜찮냐?
현철:
너라면 괜찮겠냐? 당연히 괜찮지. (미소)
민준:
그래, 괜찮지가 않지, 가 아니고? (놀라서 쳐다본다)
현철:
영수가 저러는데 적어도 맞장구는 쳐줘야지. 어떠냐, 내 연기?
민준:
뭔 소리야?
현철:
적어도 발연기는 아니란 말이지? 좋아.
(사이) 그러니까 사실 혜정이가 좋아한 건 영수였어.
영수가 맘 안 받아주니까 나랑 고민 상담하다가 사귀게 된 거고.
민준:
뭐야, 지금 이거 막장 드라마야?
현철: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혜정이 마음이 원래 그랬다는 거지.
혜정이랑 영수랑 사귄 거는 나도 알고 있는 얘기야.
영수가 이름처럼 영어 수학을 잘 해서 S대를 갔지만,
걔도 연애를 무슨 인류역사학으로 아는 애라
대학시절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거지.
그냥 그런 재미없는 러브 스토리야. 막장은 축에도 못 끼고.
민준:
아, 그러니까 아까 너는 아주 자진모리로
영수 장단을 맞춰줬다는 거냐? 이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네.
현철:
근데 안타깝게도 결말은 나 혜정이랑 별거중이다.
민준:
야, 오늘 기승전결이 왜 이래?
현철:
아까도 말했잖아, 연애와 결혼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혜정이도 나중에 깨달은 거지,
자신이 생각하던 결혼은 현실에 없다는 걸.
뭐 나도 혜정이 마음을 채워주진 못 했고.
민준:
무슨 남 이야기하듯이 하는 거냐, 지금?
현철:
그게 2년이나 돼서 그래. 그리고 생각해보면…
내가 혜정이를 좋아해서 결혼한 건지,
나를 좋아해주는 여자가 있어서 결혼한 건지 나도 모르겠더라.
민준:
그건 또 뭔 소리냐?
현철:
한마디로 곧 프리 에이전트 시장에
이 몸이 풀릴 수도 있단 이야기야. 몸값이 무시무시하게 싼 괴물 FA.
민준:
이혼이라… 아, 복잡하다, 복잡해.
현철:
너도 그러니까 너에게 맞는 여자를 찾을 게 아니라,
어떤 여자에게도 맞출 수 있는 남자가 돼야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다, 한줄 요약 끝.
민준:
오늘 말씀들이 아주. 그러니까 아까는 성당이고, 여기는 법당이고 그런 거냐?
현철:
자, 잡소리는 치우고 출발! 이제 네 놈의 연애 이야기나 들어보자.
민준:
(시동을 건다) 근데 영수는 어쩌냐?
현철:
시간을 줘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려주는 거야. 그거 밖에 없어.
민준:
(생각에 잠긴다) … 그런 거 같다.
현철:
우리도 좀 반성도 하고.
민준:
아, 모르겠다.
자동차가 도로를 달린다.
27. 몽타주, 실외/실내, 오후
(1) 거리, 실외, 오후
민준과 현철이 썬그라스를 끼고 한껏 폼을 잡고 걸어간다. 슬로우 모션.
민준:
(N) 인생이란 결국 선택의 연속이다.
이 우정을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오늘 점심 메뉴는 뭐로 할 것인가까지.
(2) 식당, 실내, 오후
민준과 현철이 팔짱을 끼고 서로를 쳐다본다.
현철:
야, 아무리 그래도 냉면은 물냉이지.
민준:
아, 뭘 모르는구만. 냉면은 비냉이 최고지.
현철:
어허, 물냉이라니까 그러네.
민준:
어디 그 걸레 헹군 물 같은 걸 좋아하고 그러냐?
현철:
하여간 한국사람 아니랄까봐 매운 것만 좋아하고.
입맛이 초딩이야, 초딩.
(3) 카페, 실내, 오후
주리와 민준이 다정하게 한쪽에 붙어서 앉아있다. 손깍지를 끼고 있는 두 사람.
주리:
이따 저녁에 뭐 볼까요?
민준:
주리야.
주리:
네, 오빠.
민준:
이번엔 액션 좀 보면 안 될까?
주리:
아, 오빠, 영화는 멜로 아니면 로코죠.
민준:
사실 멜로는 내 취향이 아니야.
주리:
네?
민준:
그냥 네가 좋아해서 같이 본 거지.
주리:
치, 오빠도 같이 울어놓고선. (입을 삐죽 내민다)
민준:
알았어. 대신 다음번엔 꼭 액션이다. (앞에 놓인 음료를 벌컥 마신다)
주리:
알았어요. 그럼 대신 잘 생긴 남자 나오는 걸로.
민준:
(N) 취향도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래, 나도 가끔은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