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공터, 실외, 오후
영수가 플라스틱 의자를 두 개를 들고 와서는 공터에 내려놓는다.
턱을 괸 현철과 팔짱을 낀 민준이 영수의 모습을 바라본다.
영수가 커다란 종이박스를 끌고 온다.
민준:
아, 저 투덜이 스머프가 기어코 일을 내는구나.
현철:
뭐라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민준:
아, 진짜 뭐 하는 거냐?
냉장고 사이즈의 골판지에 영수가 칼로 네모난 구멍을 낸다.
종이박스를 들어 올리는데 자꾸만 무너진다.
보다 못한 민준이 영수 쪽으로 다가와서 쓰러진 종이 박스를 발로 툭 친다.
민준:
너 진짜 가지가지한다. 아, 잉여가 따로 없네.
영수:
맞아, 인간이 원래 다 잉여지.
세상에 모든 게 그냥 이유가 없이 존재하는 건데,
자꾸 사람들이 목적이니 이유니 찾으니까 힘든 거지.
존재가 이유 앞에 앞서는데,
굳이 존재 앞에서 이유를 찾으니까 어려울 수밖에.
민준:
(현철에게) 야, 얘 뭐래는 거니?
현철:
아까 주차장에서 말했잖아. 샤르트르.
인간은 다 잉여다. 오늘은 샤르트르 형님의 날인가 보다.
민준:
야, 진짜 니들은 뭐 그렇게 읽은 게 많아서
사람 머리를 아프게 하냐?
(영수에게) 근데 이 링거는 왜 맞는 건데?
영수:
채식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해서 그런 건지 몸이 말을 안 듣더라.
한 한 달쯤 됐어.
현철:
(영수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 있지.
민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지금 뭘 만드는 거야?
영수:
잠깐만 기다려줘. 내가 직접 할게.
(시간경과)
영수가 불편한 몸으로 겨우 종이박스를 세우고,
현철과 민준도 돕는다.
디귿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고해소 모양이다.
영수가 의자를 박스 안에 놓아둔다.
영수:
먼저 현철이부터.
현철:
(의외라는 표정) 나? 민준이가 아니고?
그래 알았어. 고해소라...
현철이 영수 쪽으로 걸어와서는,
구멍을 낸 박스 쪽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현철:
이거 뭔가 쑥스럽네.
영수:
저기, 현철아.
민준:
(팔짱을 끼고 지켜보면서)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현철:
응, 말해.
영수:
너한테 정말 잘못한 게 있는데,
사실 너랑 혜정이랑 사귈 때 나 혜정이랑 양다리였어.
너랑 약속 취소하고 둘이서 술 마시고 그랬다.
현철:
뭐? (과하게 인상을 찌푸린다) 뭐라고?
현철이 벌떡 일어나 종이박스로 만든 고해소를 허물고 발로 짓밟는다.
급기야 현철이 영수의 멱살을 잡는다.
현철:
야,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영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날 때려서라도 화가 풀린다면 내가 얼마든지 맞아줄게.
현철:
아우, 이거 아픈 인간을 진짜 때릴 수도 없고.
(잡은 멱살을 푼다) 야, 밥이나 좀 먹고 다녀라, 진짜.
현철이 박스를 발로 뻥 차버리고는 씩씩거리며 공터를 떠난다.
(시간 경과)
영수의 팔뚝이 꽂힌 링거에서 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
영수는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민준은 불만에 가득한 얼굴로 서있다.
민준: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현철이 아내인 사람인데.
영수:
고백은 처절한 거니까 힘들어도 어쩔 수 없지.
민준:
(쓰러진 의자를 세워 앉으며) 그래, 어디 나한테도 해봐. 뭘 준비했는데?
영수:
민복아.
민준:
야! 내가 그 이름 부르지 말랬지? 이름을 바꾼 지가 언젠데.
영수:
난 말이야, 니가 하는 말이 정말 듣기 싫을 때가 있었어,
그래도 참으면서 막 실실거리며 들어줄 때면
진짜 내가 한심하더라. 무슨 가면이라도 쓴 거 같더라.
민준:
서로 어느 정도 그러는 거 마찬가지잖아? 뭐, 모르는 거 아니고.
왜 이래 진짜?
영수:
난 그게 니가 이기적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내가 변한 거고, 내가 이기적인 거더라.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고, 하고 싶은 말만 하려 하고.
민준:
흠. (가볍게 한숨 쉬고는) 그래서? 그래서 지금 뭘 어쩌자는 건데?
영수:
우리 이제 그만 보자. 친구 그만하자.
민준:
절교 선언문이냐, 이게? 야, 그전에, 너 지금 이러는 이유가 뭔데?
영수:
글쎄, (사이) 이젠 나답게 살고 싶다.
민준:
그러니까 혼자 면피하고 피박은 우리가 쓰란 얘기냐?
하여간 너 유별난 건 아는데,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영수:
나도 내가 재수 없다는 건 알아, 아는데,
그냥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어.
민준:
됐고. 우리가 예전에 주식하다가 왜 망했냐?
영수: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인데?
민준:
20프로만 먹으면 되는데,
두 배 먹으려고 버티다가 쫄딱 털렸지.
그러니까 내 말은 갑자기 다 바꾸려고 하지 말자는 거야.
딱 20프로, 그 정도만 차근차근 바꾸자.
꼭 그렇게 180도 다 바꿔야 돼?
좀 넘어갈 때도 있음 안 돼?
이런다고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없어지냐?
어차피 과거가 모여서 지금이 된 건데.
영수:
제발 좀, 너는 너 멋대로 그런 것 좀 정하지 마.
너만 정답인 거 아니잖아?
민준:
(일어서더니) 우리가 왜 친구냐?
니가 싫은 소릴 해도 그게 맞는 말인 거 아니까,
그런 니가 없으면 약이 되는 말 해줄 사람 없는 거 아니까.
(사이) 그럼 고생해라. 나 간다. 담에 보자.
(영수의 어깨를 툭 치고는 가버린다.)
영수:
(민준의 뒤통수를 향해) 야, 이제 진짜 안 볼 거라니까!
민준이 뒤는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면서 손을 흔든다.
민준:
(혼잣말) 잘 있어라, 친구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