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새로운 언어

감정으로 말하다

by 수아했어오늘도

침묵으로 나를 지키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침묵의 문제는 그저 말을 아끼는데만 있지 않았다. 말하려고 마음먹는 순간조차 나는 감정을 설명 가능한 형태로 먼저 바꾸고 있었다.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두려움이었다면, 말하려 할 때마다 막히던 이유는 결국 ‘번역’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점점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왜 우리는 감정을 번역하려 드는 걸까?


나는 감정을 말하는 대신, 감정을 설명했다.

이해받고 싶어서였는데, 그렇게 설명하는 동안 정작 나는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마음이 먼저 울었는데, 나는 늘 문장을 먼저 정리하려 했다.


’그러니까‘로 이어지는 논리,

‘결국’으로 닫히는 결론,

‘내가 예민한가 봐’로 끝나는 자기 검열.


그렇게 말하면 덜 이상해 보일 것 같았고, 관계의 공기도 덜 흐려질 것 같았다.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면 어떤 표정이 돌아올지, 어떤 오해가 생길지, 어떤 거리감이 생길지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 감정은 자주 ‘번역본’이 되었다. 원문은 분명히 내 안에서 뜨겁게 살아 있는데, 밖으로 나오는 건 매끈하고 안전한 문장이었다.


- 별일 아니야

- 그럴 수 있지

- 내가 좀 피곤해서 그래


상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대화는 무난하게 지나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말은 했는데 전달되지 않은 느낌, 더 정확히는 내가 나를 놓친 느낌이 남았다. 번역이 완벽할수록, 원문은 희미해졌다. 진짜 마음은 발음되지 못한 채 뒤로 밀렸고, 나는 스스로에게도 ‘아까 내가 뭘 느꼈더라’ 하고 묻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가 “너 오늘 왜 그래?”라고 물었을 때였다. 나는 본능처럼 웃어버렸다. “그냥 좀 피곤해.” 그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전부도 아니었다. 피곤함 뒤에는 서운함이 있었고, 서운함 뒤에는 기대가 있었고, 기대 뒤에는 ‘내가 너무 큰걸 바라나’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복잡한 층을 꺼내기보다, 가장 무난한 표면만 꺼냈다. 피곤함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감정이지만, 서운함은 설명을 요구받는 감정이니까. 그날 밤 나는 글을 쓰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말이 언제나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말’이었지, ‘내 마음을 살려내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다. 감정이 생기면 먼저 묻는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상대가 납득할 만한지. 그리고 그 질문들이 감정의 목덜미를 잡아당긴다. 감정은 원래 모순적이고, 한 번에 정리되지 않고, 때로는 설명보다 먼저 몸에 도착한다. 분노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서러움이었고, 무심함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겁이었고, 괜찮다는 말 뒤에 사실은 ‘알아주길 바람’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순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의미와 이유와 결론으로 감정을 고정하려 든다. 번역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감정의 온도는 유지되지 못한 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바뀐다.


나는 오래도록 감정이 말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정확하게 말해야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상대가 받아들이기 좋은 형태로 정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이 달라졌다. 감정은 반드시 설명이 되어야 하는가? 감정은 반드시 결론으로 닫혀야 하는가? 감정은 때로 ‘그냥 그렇다’는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는가? 나는 그 질문을 품고 나서야, 감정을 말한다는 일이 사실은 ‘정리’가 아니라 ‘존재를 허락하는 일’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번역을 늦추는 연습을 한다. 말을 잘하려는 연습이 아니라,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붙잡아보는 연습이다. 누군가 “괜찮아?”라고 물을 때 예전처럼 반사적으로 “응,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주 짧게라도 원문에 가까운 문장을 꺼내보려고 한다.


- 잘 모르겠는데 조금 불편했어

- 정확한 말이 떠오르진 않는데, 마음이 복잡해

- 기분이 애매해. 나도 이게 뭔지 찾는 중이야


이 문장들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진짜에 가깝다. 설명은 매끈하지만, 감정은 늘 울퉁불퉁하니까.


가끔은 말보다 먼저 몸을 확인한다. 가슴이 답답한지, 목이 꽉 막힌 느낌이 있는지, 손끝이 차가운지. 감정은 언어보다 먼저 신체에 흔적을 남기는 때가 많다. 나는 그 흔적을 따라가며 말의 방향을 잡는다.


“지금 내 목이 막힌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사실은 긴장한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갑자기 철학자가 되는 기분일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이 방식이 나를 덜 비틀어지게 한다. 내 마음을 ‘납득시키기’보다 ‘살려내기’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조심스럽다.

여전히 말은 두서를 잃고, 표현은 서툴다.


어떤 날은 용기 내어 꺼낸 말이 기대만큼 전해지지 않아서 다시 침묵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그런데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이제 내 감정을 내 뒤로 미루지 않으려 한다. 관계의 공기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가장 먼저 나를 지우지는 않으려 한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괜찮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던 내가, 요즘은 그 말 앞에 한 박자를 둔다. 그 한 박자 동안 나는 내 마음에게 묻는다. 정말 괜찮은가, 아니면 괜찮은 척하고 싶은가. 그 질문 하나가, 나를 조금 더 나 쪽으로 돌려세운다.


어쩌면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비슷한 간극 안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느끼지만 말하지 못하는 감정들, 지키려다 잃어버린 자신들, 안전과 이해받을 기회 사이에서 망설이는 순간들. 그 모든 침묵 앞에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감정에 자격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감정은 성적표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이니, 먼저 정답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감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다만 번역하기 전에 원문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전에, 내 마음이 어떤 언어로 울리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묻는 일이다. 설명이 아니라 존재로 남게 하는 말, 결론이 아니라 과정으로 두는 말.


나는 아직 그 언어를 배우는 중이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번역본만 남겨두던 삶에서,

이제는 원문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것.


내 안에서 먼저 울린 것을,

내 안에서부터 지우지 않겠다는 것.


그 약속 하나로,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조금 더 ‘내 것’으로 되돌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