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질문만이 삶을 계속 살아 있게 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 무언가를 하고 싶어질 때는,
마음이 평온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하거나 억압된 상태였던 때가 더 많았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을 때, 그럴수록 더 하고 싶어지고 더 생각났다. 금지된 것처럼 느껴질수록 욕구는 더 선명해졌다. 그 시절의 나는 글을 쓰고 싶어 했고, 쓰면서도 더 잘 쓰고 싶어 고뇌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건 단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욕구가 안에서 부풀어 올라 결국 글이라는 형태로 흘러나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로는 꺼내지 못했던 마음, 관계 속에서 눌러둔 감정, 제때 표현하지 못한 나를 글이 대신 발화해줬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이 흔들릴수록 문장은 더 절실해졌고, 평온해질수록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상태에 가까워지곤 했다. 이상하게도 행복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졌고, 행복하고 싶을 때는 더 절박하게 무언가를 붙잡았다. 이별하면 모든 이별 노래가 내 노래 같고, 행복할 때보다 불행할 때 글이 더 잘 써진다는 말이 꼭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 또한 행복할 때보다, 행복하고 싶을 때 글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불안을 신성시하고 싶지는 않다.
고통이 있어야만 창작이 된다는 말은 듣는 순간 멋있어 보이지만, 결국 사람을 다시 상처 쪽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불행이 나의 재능을 증명해 준다는 착각은 위험하다. 슬픔이 있어야만 내가 ‘진짜’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몰래 몰아세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불행할 때 글이 잘 써지는 게 아니라, 불행할 때는 내 안의 소음이 커져서 결국 그 소음을 밖으로 꺼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뿐이라고. 글은 고통의 증거가 아니라, 고통을 덜어내려는 몸짓에 더 가깝다고.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남는다.
왜 평온해지면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걸까. 예전의 나는 그 상태를 나태로 오해했다.
- 왜 이렇게 느슨해졌지?
- 나는 역시 꾸준하지 못해. 결국 작심삼일이었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걸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한다. 어쩌면 평온은 공백이 아니라 침전이다. 바닥에 가라앉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언젠가 나는 버스 창가에 앉아 이어폰으로 흘러들어오는 밝고 경쾌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슬픈 노래도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났다. 그때는 왜 눈물이 차올랐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슬픔이 아니라 안도였던 것 같다. 오랫동안 긴장하고 있던 몸이, 이제야 풀려도 괜찮다는 신호를 받은 것. 너무 오래 흔들리며 살았던 사람은 고요가 찾아오면 처음엔 멀미부터 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앞에서 초조해지고, 의욕이 사라진 자신을 낯설어한다. 하지만 침전은 멈춤이 아니라 정리다. 물이 맑아지는 과정처럼 마음도 가끔은 가라앉아야 제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요즘 그런 시간을 ‘쉬는 시간’이라기보다 ‘가라앉는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성과를 증명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조용히 정돈되는 시간. 한때는 불안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면, 지금은 고요가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인간적인 리듬이다. 사람은 언제나 앞으로만 달릴 수 없고, 달린 만큼 가라앉는 시간도 필요하니까.
그래서 나는 ‘행복할 때 아무것도 안 하게 되는 나’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행복은 나를 게으르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나를 잠시 내려놓게 한다. 그 내려놓음 속에서 나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내 감정의 잔해를 발견한다.
불안 때문에 미뤄뒀던 감정들, 억지로 밝게 지냈던 날들의 피로, 잘 견뎠다고 넘겼던 작은 상처들. 평온은 그것들을 조용히 끌어올린다. 마치 밤이 되어서야 들리는 낮의 소음처럼, 고요 속에서만 들리는 마음의 잔향이 있다.
그럼에도 질문은 다시 찾아온다. 평온의 한가운데에서도. 오히려 그때 더 또렷하게. 요즘 내가 자주 묻는 질문은 이거다.
- 나는 언제 나를 믿지?
믿음이 필요한 순간에 믿지 못하는 나와, 믿지 않아도 될 순간에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나. 어느 쪽이 진짜일까. 예전에는 질문이 나를 몰아붙였다. 답을 내놓으라고, 당장 결론을 내리라고, 지금 이 순간을 생산적으로 만들라고.
그런데 이제는 질문이 꼭 답을 요구하는 건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질문은 때로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다. 길이 아니라 나침반이다. 그러니 질문이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내 삶의 방향을 감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을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질문을 없애야 비로소 안정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질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 답을 내지 못하는 나를 무능하다고 단정하지 않고, 질문이 머무는 자리를 내 안에 조금 열어두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 질문만이 삶을 계속 살아 있게 한다’는 말은,
어쩌면 삶을 불안으로 몰아넣는 문장이 아니라
삶을 살려두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질문은 나를 흔들지만 동시에 나를 깨운다.
불안이 나를 쫓아오던 시절에는 질문이 나를 찢어놓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다르다. 질문은 나를 망가뜨리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예전처럼 다그치지 않고,
결론을 강요하지도 않고.
질문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로 두고.
불행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불행이 남긴 흔적을 외면하지 않고,
평온을 죄책감으로 덮지 않으면서도
그 평온의 침전을 신뢰하며.
질문이 있다는 건,
내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