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드로잉
빈 종이, 물감, 붓, 파스텔, 작업대 위의 여러 도구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정지화면이고 사물이다.
아무 변화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다. 한마디로 무생물.
그런데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종이 위에서 내 손과 함께 움직이며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태어난다.
시작하기 전에는 작업을 하는 나도 무엇이 태어날지 알 수 없다.
나의 엄마가 나를 품고 있는 동안 내가 어떤 존재일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모든 끄적거림이 살아있는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정신과 손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만드는 작품은 '어떤' 생명력을 가진 그 무엇이 된다.
종이와 도구가 만나는 그 순간 일단 내가 시작을 하면, 그다음에는 그림 스스로의 힘으로 다음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그것은 움직이고, 성장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가기도 한다.
나의 의도와도 다르게. 내 의지 밖의 무엇이 되어 혼자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무엇인가가 가지는 특징 아닐까?
한 장의 종이 위에서의 시간이 끝난 그림의 에너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음 종이 위에서 그 모습을 이어간다. 때로는 그 전의 그림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보이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속의 유전자가 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죽어도 그 유전자를 이어받은 다음 세대가 생을 이어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