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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ibi Feb 16. 2021

아마도 나는 지구에 온 22, <소울>

영화 <소울> 스포일러 후기

제주에 온 지 딱 일주일 차. 

첫 주는 집을 정리하고 밥 해 먹고 커피 내리는 일상의 활동들이 가장 큰 이벤트고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였는데, 일주일이 지나가니 벌써 서울에 버리고 온 걱정들이 배달 온 건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 핑계로 점심을 해 먹고 살짝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던 차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정말 그냥 생각이 나서 수다나 떨려고 전화를 했다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영화 <소울> 얘기가 나왔다. 


그거 재밌어? 짱 재밌어. 너 지금 고민이 많다면 한 번 보는 걸 추천해. 그으래? 가까운 영화관을 검색하니까 25분 뒤에 시작하는 상영이 있다. 영화관까지는 걸어서 17분. 친구야 고마워 나 지금 그거 보러 가려고! 전화를 끊고 겉옷만 챙겨 입고 영화관까지 전속 질주를 했다. 오늘은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날이어서 안 나가려고 했는데... 역시나 어마어마한 강풍이 나를 뒤에서 밀어주어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영화관까지 11분에 주파, 표를 뽑고 가볍게 물까지 사서 무사 착석. 제주도의 아주 작은 상영관인데 생각보다 관객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거, 1년 만이다.


<소울>은 어른이 주인공인 <인사이드 아웃>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인사이드 아웃>은 어린이 영화인 척하는 어른 영화였다면 <소울>은 대놓고 어른 영화다. 그다지 비슷하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피트 닥터는 이번 영화도 입이 떡 벌어지는 상상력을 눈이 황홀할 만큼 멋지게 시각화해냈다. 피카소 그림을 닮은 제리들,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상상하는 걸까. 게다가 실제보다 저 실제 같은 섬세한 그래픽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저런 건 어떻게 모델링하는 걸까... 그리고 요즘 재즈 음악에 빠져서 하루 종일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뮤지션들의 재즈 테이프를 틀어놓고 지내는데, 음악도 참 좋았다.


중학교 밴드부 교사로 근근이 일하다 처음으로 유명한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게 된 재즈 뮤지션 조 가드너, 기쁨에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뉴욕 거리를 날뛰다가 맨홀 구멍에 빠져 황당한 죽음을... 맞기 직전에 저세상 가는 길에서 탈주해 태어나기 전 영혼들의 세계로 가게 된다. 여기서 영혼들은 각자의 성격을 부여받고, 저 마다의 지구에 갈 이유인 '불꽃'을 찾게 되면 지구 통행증이 생긴다. 절대 저세상으로 가지 않으려 도망 다니던 조는, 우연히 태어나길 거부하는 300년 묵은 회의주의자 영혼 22의 멘토링을 맡게 되는데...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길 원하는 조 가드너와 절대로 태어나고 싶지 않은 22. 둘이 환상의 짝꿍이 되어 좌충우돌 우주부터 지구까지 정신없이 누비는 이야기.



소올직히 다 보고 난 직후의 감상은 이랬다. '뭐야 그래서 또 일상의 소중함 하루의 사소한 행복, 이것이 삶의 불꽃이다~ 그런 흔하디 흔한 말을 하는 거야? 조 역시 본인의 꿈을 이뤄봤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거지. 그것도 다 가져본 자나 깨달을 수 있는 거라구.' 그치만 영화를 다 보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다가 눈부신 노을과 내 사랑 야자수의 멋진 콜라보 장면을 마주쳤을 때, 나도 모르게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감탄을 내뱉을 때, 아 내가 바로 22구나.


고작 반나절 짜리 체험판 지구만 경험해보고 이 고통과 번뇌의 행성으로 날아오다니. 망겜도 어지간하면 체험판은 재밌다. 게다가 피자는 반칙이지... 지구 인생은 퍽퍽하다. 던져져도 까르르, 찌부돼도 까르르 웃던 보송보송 영혼이들은 물 먹은 솜마냥 무거운 몸뚱이 속에 녹아 사라졌다. 바쁠 땐 단풍나무 씨앗 따위 알게 뭐야...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역시 그때 내 생각이 옳았는데 유 세미나나 건성으로 다니며 멘토들 골려주는 재미로 지냈어야 했는데!


그렇게 부여받은 회의주의 끝판왕 기질이 꿈틀대다가도... 지금처럼 우연히 멋진 노을을 마주칠 때, 처음 시도해본 요리를 맛있게 성공할 때, 오늘의 바보짓을 친구에게 말해주고 같이 깔깔 댈 때, 엄마랑 전기장판에 누워서 어이없는 드라마를 볼 때, 아빠가 구워준 살짝 찌그러진 마카롱을 찰칵찰칵 찍을 때, 보도 블록 구석의 어여쁜 노란 꽃을 발견할 때, 재즈를 틀어놓고 이런 하루의 소소한 이벤트에 대해 사각사각 일기를 쓸 때. 그래도 역시 지구에 오기를 잘했다! 하며 조 가드너에게 감사의 텔레파시를 보내는 22. 가드너의 재즈를 들으러 뉴욕에 한 번 더 가야겠다!


일상이 소중하다, 작은 행복을 놓치지 말자, 이런 말들은 진부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더 틱틱대고 싶어 지는 삐뚤어진 22. 만약 유세미나에 멘토로 간다면, 내가 어? 뉴욕 피자에 홀랑 넘어가서 지구에 갔자나~? 너어는 이런 거 하지 마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살아보고 싶다면, 보송이들이 지구에 대해 궁금해 안달이 났다면, 그럼 나는 '한 번 맛만 봐볼래?' 하고 체험판 지구를 슬쩍 들이밀 테다. 일단 한 번 잡솨바... 가끔은 괴로워도 분명 나를 고마워하게 될 거야. 진부한 말이 진부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지구에 가서 맛있는 밥 한 끼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먹게 된다면 그걸로 넌 본전이라구.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의 불꽃은 흑돼지 너로 정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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