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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Jul 03. 2023

행복한 악몽을 통해서

도영의 편지 4

지은에게



너의 시간은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안녕해졌을까? 괜찮냐는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 마땅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은지. 안 괜찮다는 대답에 특별한 위로도 도움도 줄 수 없는 주제에 계속 너의 괜찮음을 확인하고 싶은 나야.


어두웠던 그 시절을 색채나 형태로 기억한다는 지난 편지 속 너를 읽으며 내 안에 깊게 박혀있는 한 장면이 떠올랐어. 고등학생 때 내 방은 얇은 벽 하나를 두고 거실에 붙어있었어. 부모님이 싸울 때면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벽을 타고 날카롭게 흘러들어왔지. 보지 않고 듣기만 해서 그랬을까? 시각이 차단된 채로 듣는 싸움은 더 크고 잔인했어. 방 안에 혼자 앉아 난 그들의 성난 문장과 찌르는 단어, 씩씩대는 숨소리들을 씹어 삼켰지. 


그럴 때마다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귓가에 대고 이야기하듯이 더 크게 들리는 소리에 난 항상 포기를 선언하고 거실과 맞닿은 벽에 기대앉았지. 그렇게 있으면 등 뒤로 싸우는 소리가 쿵쿵대고 울렸어. "당신 때문에 애가 저 모양이잖아." "당신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말해?" "당신이야말로 집에서 하는 게 뭐가 있는데!" 한참을 듣고 있다 보면 늘 어느 순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그 순간 시선을 내리면 바닥의 장판과 벽지의 틈새로 새까만 거미가 하나둘 나오고 있었지. 까만 거미들은 점점 많아졌고 결국 새카맣게 벽을 뒤덮었어. 나는 몸을 점점 웅크리며 등 뒤의 수없이 많은 거미들을 느꼈지.




지은아, 네가 그 시절을 곰팡이 같은 회갈색과 보라색의 형태들로 기억하듯이 나는 불행했던 과거를 벽을 타고 오르던 수없이 많은 거미들로 기억해. 부모님의 싸움마다 반복되었던 그 환상은 눈을 뜬 채로 꾸는 끝나지 않는 악몽 같았어.


실제로 당시의 난 악몽을 많이 꿨어. 얼마 전 편지에 적었던 그림이 날아가버리는 꿈은 귀엽게 느껴질 정도의 잔인한 꿈을 자주 꾸었지. 꿈속에서 우리 가족은 죽고 또 죽었어. 머리가 잘리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고, 샤워기에 목을 매달고, 가위로 온몸이 잘리고... 가족 중 한 명이 배신하고 날 버리는 꿈 정도는 평화로운 수준이었지. 악몽의 조각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웠었어. 평생 우울의 잔해를 안고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운 너처럼 말이야. 언젠가는 악몽을 꾸지 않는 날이 찾아올까? 불가능한 희망 같았어. 


그리고 오늘, 내 꿈에 또 가족들이 나왔어.


꿈속 우리 가족은 여행 중이었어. 왜인지 부모님은 아직 함께였고 익숙하게도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지. 그러다 분에 못 이긴 아빠가 벌게진 얼굴로 숙소의 방으로 들어간 후 난 엄마에게 다가갔어. "아빠한테 차분히 엄마가 기분 나빴던 일들을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계속 설득하자 엄마는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말했고 마침내 대화는 시작됐어. 과거의 일들을 되짚으며 아빠가 뭘 잘못했는지를 말하는 엄마와 중간중간 엄마의 말을 끊어가며 변명인지 남 탓인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는 아빠의 모습은 여전히 화목해 보이지 않았어. 그렇지만 더 이상 서로를 깔아뭉개는 말들이나 귀를 막고 싶은 고함은 없었지. 시뻘건 얼굴을 하고 최선을 다해 낮춘 목소리로 자신만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그 삐걱거리는 대화가 꿈속의 난 흐뭇했던 것 같아. 대화가 끝난 후 엄마에게 다가가 "그래도 대화하길 잘했지?"라고 웃으며 말했거든.


그렇게 꿈에서 깼어. 꿈과 현실에 발을 반씩 걸친 채 '행복한 악몽이었다.'라고 생각했어. 현실에서 차분히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어떤 이해에도 도달하지 못했어도 대화를 나누는 엄마아빠의 모습 그 자체가 좋았어. 그러다 문득 깨달았지. 내 악몽이 많이 밝아졌다는 걸 말이야. 지금 내 악몽은 더 이상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장면들이 아니라 부모님이 대화를 나누는 이뤄지지 않았던 소망을 보여줄 뿐이었어.


지은아 네가 물었지. 

불행이 우리를 조금도 짓누르지 않는 날이 올까?


나는 이 행복한 악몽에서 희망을 보았어. 시간은 흘렀고 내 꿈은 이제 악몽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잔인하지 않아. 사실은 악몽을 두려워하며 잠에 들지 않은지도 제법 오래됐어.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의 미래에는 악몽으로 괴로워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는 날이 오지 않을까? 괜찮지 않은 날들에 괜찮은 날들이 섞이다 괜찮지 않은 날보다 괜찮은 날들이 더 많아지면, 결국 괜찮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불행이 존재했었다는 것조차 잊고 티 없이 행복하기만 한 그런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어.


그래서 더욱 너의 오늘 하루가 괜찮지 않은 요즘에 섞인 괜찮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너의 괜찮을 하루를,

나의 평온한 잠을 바라며



도영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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