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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Jul 08. 2023

불행은 고여있다 못해 구정물이 되어

지은의 편지 4

도영 언니에게



언니, 한국은 며칠 동안 비가 내리고 있어. 시원하긴 하지만, 맑은 하늘 아래 산책할 수 없어 아쉬운 날씨야. 한 달 전 언니에게 보낸 편지와는 조금 다르게 내 삶은 안녕하게 흘러갔어. 언니가 빌어 준 괜찮은 날에 속하는 요즘이 많아지고 있어. 그맘때의 난 몸과 마음이 무거워 침대 밖으로 벗어나질 못했는데, 근래에는 가끔 집 앞 하천을 산책하며 바깥 공기를 쐬기도 해.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날에는 약국에서 파는 안정액을 먹으며 불안함을 조절하고 있어.


지난번 언니의 편지를 읽고 악몽으로 잠을 지새우던 지난해가 떠올랐어. 특히 작년, 회사에 다니지 않던 시기에는 꿈을 꾸기만 하면 8할은 악몽으로 잠을 설쳤었거든. 나도 모르게 혼자만의 시간에 매몰되었었나 봐.


작년 말이었던 것 같아. 오늘 날씨와 같이 비가 며칠째 내리던 날, 내 자취방 천장에는 물이 샜어. 사실 조금씩 천장에 곰팡이가 슬고, 물방울이 맺혀가는 걸 있었지만 몇 개월 동안이나 못 본 척하고 있었어. 현실적인 이유였어. 계약 기간이 끝난 채 인상 없이 살고 있던 내가 주인아저씨에게 연락하면 월세를 올려달라 할 것 같았거든. 못 본 척하다 보면 이 비가 멈추고 날이 맑아지지 않을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으로 자취방 천장을 외면했어. 그렇게 새어가는 물을 버려두던 어느 날, 악몽을 꿨어. 지난번 편지를 읽으며 언니의 꿈과 이 악몽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세모난 지붕에 네모 뼈대를 가진 집, 그리고 오른편의 기다란 굴뚝. 어린애들이 자주 그리는 정형화된 집의 형상에서 꿈은 시작됐어. 그 집은 내 유년기 불행의 표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어. 취할 때마다 반복되던 아빠의 손찌검과 소리높여 저항하는 엄마, 작은 방구석에서 울고 있던 내가 살던 반지하 집. 잠에 깰 때마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다 결국엔 이부자리 옆에 대야를 가져다 두고 토를 하며 술 마시던 아빠. 그 씁쓸한 소주 냄새와 위액 냄새가 뒤섞여 있던 옥탑방 집. 불행은 고여있다 못해 구정물이 되어 꿈속의 집을 가득 메우고 있었어. 그 물은 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어서, 나는 이내 집 속의 집을 만들었어. 집속의 집이라 겨우 한 명 몸을 뉠 수 있을 만큼 작고 비좁았지만 안락했고, 나는 평온을 찾을 수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있던 구정물이 집 속의 집까지 들어오게 된 거야. 구정물은 방심하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벽을 새까맣게 물들였어. 바삐 움직이며 온몸으로 구멍을 막았지만 여력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집속의 집을 바라보며 울부짖었어. “왜 나는 벗어날 수 없는 거야.” 그렇게 소리 지르며 나는 잠에서 깼어.



육지에서 첫 숨을 쉬는 해양 동물 마냥 헐떡이며 일어난 그날을 난 잊을 수 없어. 그맘때의 무력함은 한동안 나를 잠식했던 것 같아. 잔인하고 유혈이 낭자한 풍경보다 그날의 꿈이 나는 더 무서웠어. 어린 시절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운명이 말해주는 것 같았어. 하지만 운명의 속삭임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나 자신도 이 굴레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꿈에서 깬 나는 자꾸만 물이 새는 천장이 꼭 나인 것만 같아서, 주저앉아 몇 시간 동안 울기만 했어.


다행히도, 현실이 걱정보다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어. 수도꼭지를 틀어둔 듯 줄줄 새는 천장을 보며 나는 결국 주인아저씨께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 뜯어진 천장이 수리되는 것을 보며, 더이상 같은 악몽은 꾸지 않겠구나 안도했어. 걱정이 무색하게도 월세도 오르지 않았어. 그 이후로도 종종 다른 종류의 악몽을 꾸긴 했지만 잦아들었고, 다행히 요즘은 우울하고 힘든 날이라도 악몽을 꾸지 않아. 이건 지난번 편지 말미에 언니가 적은 소망 덕분일지도 몰라.


언니, 나는 자꾸만 불행과 행복 사이 줄다리기하는 나와 언니를 보며 불행을 희석하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거라면 불행이 견딜만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우리의 불행이 행복을 완성할 발판이 된다면 불행을 헛되지 않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불행이 옅어져 희석된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만약 그런 날에 다다른다면 누구보다 언니의 행복을 축하해 줄게.



지은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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