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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Jun 26. 2023

내 인생이 맑은 색채로
물들 날이 올까요

지은의 편지 3

도영 언니에게



언니, 잘 지냈어?


얼마 전 화상 통화를 했지만, 새삼스레 안부를 물어. 그날 말했지만 나는 요즘 좀 불안해하고 있어. 근본 없는 불안인지라 나름 명상도 해보고 있지만 가라앉지 않네. 한 달 전 잘 지낸다던 글을 적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얄궂게도 그 평안이 오래가진 않더라. 아마 이직한 회사에서 적응하느라 에너지의 총량을 다 소진했나 봐. 집에 돌아오면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TV나 보다 잠드는 나날의 연속이야.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받을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주 작은 바늘에도 펑 터져버리는 풍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최근엔 작년에 받았던 신경정신과 상담을 자주 떠올리고 있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거래. 우리 집은 부부 싸움이 잦은 집이었으니 아마 유치원생 때부터였을까? 우울증은 일시적으로 회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재발을 반복하게 된대. 재발은 점점 더 짧은 주기로 반복되고. 그러니까 난 우울증을 완치하지 않는 이상 점점 더 짧은 주기로,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우울과 함께해야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력함과 불안함이 너무 지겨워. 평생을 악몽에서 깨어날 수 없는 걸까 싶어서, “지긋지긋해.”라는 소리를 나도 모르게 하게 돼. 그러다가도 관성적으로 불행을 받아들이는 내 모습을 발견해.


내가 내면의 우울을 직시하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어. 전교적으로 실시한 정신 관련 설문을 마치고 며칠 안 지났을 무렵, 담임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따로 불러 물으셨어. 혹시 많이 힘들고 지치냐고. 학년생 중 가장 결과가 안 좋게 나와 걱정하며 물으시는 선생님께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대답했어. 그냥 집에서 조금 힘든 일이 있어서 우울했던 것 같다고. 나는 집에서의 일을 끌어오고 싶지 않았어. 그 시절 나에게 학교는 유일한 숨통이었거든. 조현병이 극에 다다른 엄마가 같이 죽자며 고성방가를 지르는 통에 민원은 허구한 날 들어오고, 화장실에 CCTV가 있다며 엄마 몰래 목욕해야 하는 나날을 ‘그냥 조금 힘든 일’로 치부하기엔 벅찼지만 말이야. 안락하지 않았던 집에서 벗어나 버스로 20분이면 학교에 도착하고, 나를 짓누르는 문제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학교에서는 엄마와 관련한 말을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어.



어른이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어린아이의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슬픔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도.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젠가부터 누군가에게 내 불행을 털어놓기보단 이건 내가 결정한 나의 인생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에 몰두했어. 이건 꽤 효과적인 처방이었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울함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만 해도 말이야.


이십 대 초반 무렵, 엄마의 병세가 조금 호전된 것 같아 나는 넌지시 말을 건네봤어. “그때 엄마가 집에 CCTV가 있다고, 우리가 다 도청당하고 있다고 그랬잖아. 항상 그릇을 부시고. 그때 참 힘들었는데.” 나는 마치 친한 친구와 어린 시절 싸운 얘기를 하듯 가벼운 투로 얘기했어. 진지하게 얘기하며 엄마의 신경을 긁는 일은 없었으면 했거든. 그러자 엄마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정신이 아주 아팠다고 말하더라. 그런 대답에 안도하던 것도 잠시, 그렇지만 CCTV는 진짜로 있었고, 그 새끼가 우리를 그렇게 괴롭혔다며 엄마는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렸어. 고등학생 시절 느꼈던 무력함을 다시 마주하며 오랜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내가 시각과 관련한 직업을 가진 탓일까? 나는 과거를 회상하면 가끔 그 시절이 어떤 색채나 형태로 느껴질 때가 있어.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의 나는 연두색과 옅은 모래색으로 이루어져 몽글몽글한 움직임이야. 하지만 그맘때 집에서의 기억은 아주 대비적이야. 곰팡이처럼 회갈색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져 납작하고 불규칙한 형태가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어. 심지어 그것은 마치 포자처럼 공기 중 부유하며 학교에서의 맑은 색채를 점차 물들여. 필사적으로 집과 학교를 구분 지으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일까?


언니, 나는 요즘 우울증 치료를 다시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어. 엄마가 완치되지 못한 조현병의 찌꺼기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나 역시 우울의 잔해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두려워. 엄마로 인한 것이라 믿고 살았던 나의 내밀한 어둠이, 사실은 나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해. 한편으로 이제 와서 우울의 기원을 찾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야.


도영 언니, 불행이 우리를 조금도 짓누르지 않는 날이 올까?

조금의 어두운 색채도 섞여 있지 않은 그런 날이.



지은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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