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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Jun 18. 2023

불행의 그림자가 길어진 밤

도영의 편지 3

보고 싶은 지은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어?


나는 정말 잘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는 보르도로 여행을 다녀왔어. 파리보다 훨씬 더 화창한 하늘 아래 오래된 거리를 거닐며 온갖 농담을 던지고, 모퉁이 가게에 앉아 시원한 젤라또를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지. 질 좋은 보르도 와인도 잔뜩 마셨어. 완벽한 행복이었지.


너도 그럴까? 나는 가끔 행복한 순간이 생경해. 익숙하지 않은 충만함이 어색하고 이 행복의 뒤로 곧 불행이 찾아올 것만 같아. 그럴 때마다 난 의식적으로 중얼거려. 불행하고 불안했던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행복하고 즐거운 현재가 나의 보통이 될 거라고. 내 인생은 늘 행복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거는 이 최면은 제법 효과가 좋아. 행복이 정말 계속될 것 같거든. 그런데 있잖아. 사실은 그래도 무서워. 다시 불행한 시간이 찾아올까 봐, 지금의 행복이 없어져버릴까 봐 문득문득 두려워져. 과거의 불행은 내 현재에 아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나 봐.


열두 살 정도였나. 그날은 엄마의 생신이었어. 내가 더 어렸을 때 엄마는 당신 생일이 뭐가 중요하냐며 생일을 말해주지 않았었거든? 그리고 그 해는 엄마가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말했던 최초의 해였어. 그래서 나는 엄마의 생신을 최선을 다해 축하해 드리겠다고 다짐했지. 엄마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기로 했어. 열심히 레시피를 찾아서 미역을 불리고, 마늘을 다졌지. 고기도 사서 넣었던 것 같아. 그렇게 미역국을 다 만들었는데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아빠가 다퉜던 거야. 동생과 관련된 일이었던 것 같아. 크게 다툰 후 엄마는 집을 나갔어.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나는 부엌에서 식어가는 미역국을 생각했지. 너무 식으면 맛이 없을 텐데... 초조해하던 그때 아빠가 말했어. 엄마가 생일에 나가서 연락도 안 되는데 찾지도 않는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화를 냈지. 그리고 아빠에게 더 이상 혼나기 싫었던 내가 엄마를 찾으러 나가려던 찰나에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어. 엄마! 어디 갔다 왔어요. 생신 축하드려요. 제가 만든 미역국 드셔보세요. 그런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여전히 속상해있던 엄마는 내 생일 따위 무슨 의미가 있냐며 미역국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지. 결국 나는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만든, 아무도 먹지 않은 미역국을 직접 개수대에 버렸어. 그리고 다시는 엄마를 위해 요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얼마 전 엄마가 서운해하더라. 날 위해서 요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엄마는 머쓱해하며 웃었어. 분명 내가 그날의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만들었던 몇 번의 요리들이 떠올랐던 거겠지.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미역국을 버렸던 그날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해. 원래 아프게 한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잖아.



있잖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요새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같이 살기 시작한 남자친구는 늘 내게 잘해주고 배려해 줘.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그런데도 나는 왜 습관처럼 불행을 상상하게 될까. 이런 내가 행복을 불행의 굴레로 끌고 들어가 버릴까 봐 무서워.


유년 시절의 경험이 평생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을 믿지는 않지만 그 말의 뜻은 이해해. 최선의 사랑을 해서 파리까지 와있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화목한 가정을, 영원한 사랑을 믿기가 어려우니까. 우리 주변에는 보고 꿈꿀만한 화목한 가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을 모범으로 삼고 꿈꿀 수 있겠어.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을까. 부모님의 이혼을 알게 되었던 날은 대학교 장학금을 신청하려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뗐던 날이었어. 주민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열어보았던 내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아빠가 없더라. 부모님의 이혼 소식을 그렇게 알았어. 아빠도 엄마도 아닌, 하다못해 먼 친척도 아닌 주민센터에서 떼주는 서류 한 장을 통해. 웃긴 게 뭔지 알아? 몇 년 후에 같은 방법으로 아빠에게 배다른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이혼한 아빠가 불륜 상대와 자식을 자기 호적에 올렸거든. 옛날에 엄마가 그랬어. 아빠와 결혼하고도 몇 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빠가 그럼 아이를 낳지 말고 우리끼리 평생 알콩달콩 살자고 했다고. 우리 둘이서도 잘 살 수 있으니 몸 아프게 고생하지 말자며 엄마를 다독였다고. 아빠의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을 텐데. 사랑했던 사람에게도 그토록 잔인하게 굴 수 있다면 사랑만큼 덧없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었다고 믿는 게 나을지, 처음부터 진심 따위는 없었다고 믿는 게 나을지 난 통 모르겠어.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 때면 사랑도 행복도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내가 참 바보 같아.


지은아, 어째서 불행의 그림자는 이토록 길고 밤의 악몽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걸까.

티 없이 행복하고만 싶어 쉼 없이 달리는데도.



도영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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