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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Dec 06. 2024

<운명이 내일 결정된다면>

"여보세요?"

공명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힘차면서도 감미롭다고 재영은  생각했다.  외모만 아니었다면 투란도트 공주 역할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아까운 가수다.


 “유진 씨, 오랜만이에요. 지금 미나 씨가 쓰러져서, 119 구급차에 실려 갔어. 초연 하루 전 리허설인데.


어머, 어떡해요? 미나가 왜 갑자기? 평소 건강했는데요. "

유진은 미나의 음악 대학교 동창이다.  유진과 미나는 매우 친했다.


"호흡도 되찾았고, 이제 괜찮다는 연락도 왔으니 너무 걱정 말아요."

"정말 다행이네요."

유진은 안도하면서도  재영이 왜 전화했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재영은 잠깐 침묵했다. 미나가 쓰러진 이유가 짐작은 갔다. 타타르 왕국에서 축출된 늙은 왕 티무르 역을 맡은 주호와의 결별 때문인 것 같다. 둘이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헤어진 것처럼 보인다.

오늘 류가 티무르를 보필할 때 동선 처리와 연기가 안되었다. 미나는 이번 리허설에서 대사도 잊어버렸다. 류의 아리아 <왕자님, 들어주세요>에서 '얼마나 당신의 이름을'

까지만 부르고 멈췄다. 세 번째 소절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공연 전체가 망가졌다.

며칠 전까지는 연습 티무르 장면에서 불필요한 스킨십이 눈에 띄어 재영이 여러 차례 지적을 했었다.  


"그건 그렇고, 물어볼 게 있어요. 유진 씨, <투란도트> 오페라 전체를  외웠다는데, 사실이에요? 미나 씨가 쓰러지기 전 대역으로 유진 씨를 추천했어요. 미나 씨는 공연 포기했어요."

재영은 배우들에게 해본 적 없는 미쳤다는 비난까지 미나에게 했었다. 앞으로 미나는 오페라 계에 발을 들여다 놓기 힘들 것이다.


"네, 각 인물들 대사와 동작들 다 공연 가능해요. 많이 연습했어요. 어떤 역이든 맡고 싶어서요. 군소 인물들도 여자든 남자든 다 연기할 수 있어요."


유진은 망설임이 없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은 친구가 준 천금 같은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우리 미나, 나한테 그렇게 미안해하더니. 까탈스럽고 예민해도 유리알 같이 투명하고 거짓이 없어.' 

유진의 머릿속에 아름다운 미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 웬만한 걸그룹 멤버보다 더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을 꽉 채우고 있다. 가는 목과 허리로 여성스러움이 돋보였다.

미나는 어려움 없이 자란 공주 같았다.


그럼, 미안하지만, 지금 우리 오페라 사무실로 와 줄 수 있어요? 간단히 모니터링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재영은 일단 안심이 되었다. 공연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아, 투란도트가 낸 첫 번째 수수께끼가 생각나네. 일 밤 태어나서, 매일 아침 죽는다는 희망. 제발 내일 아침에도 살아 있어라.' 

재영도 간절했다. 열흘 동안 같은 배역을 맡은 하영 혼자서 공연을 이끌어 가는 것은 무리였다.


“네. 갈 수는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저 그대로예요.  

유진은 목소리에 힘이 빠져서, 속삭이듯 대답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노래는 잘 부르지만, 사랑하는 칼라프의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고 자결하는 불쌍한 시녀 류 역할을 하기에는  유진의 체격이 너무 크다고 재영은 생각했었다. 유진을 오디션에서 떨어뜨리고 미나를 선택했던 것이  실수였다. 미나는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서 극 중 인물에게 몰입이 잘 안 되었다. 인물을 연기할 때 자신의 감정을 지우지 못했다. 어쨌든 끔찍한 배우다. 이젠 미나의 아름다움 따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즈음 흐름이 이상한 거지. 오페라 공연장에서도 외모 지상주의가 팽배해. 나도 정신 차렸어. 배우의 태도와 노래가 더 중요하지. 이번 공연에서 새로운 류에 도전해 보려고."


유진은 눈물이 핑 돌았다. 목소리가 울먹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대답했다.


"네. 감독님. 감사합니다. 저를 불러 주셔서. 그럼 1시간 뒤에 뵙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 의상도 가져가 볼게요."


유진은 전화를 끊고 흐르는 눈물을 티슈로 닦았다. 3월 공연에서 유진은 미나와 군중 속 한 인물로 역할을 맡았었다. 3월 공연은 열흘 동안 성황리에 마쳤다. 올해가 푸치니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대중들의 관심도 높았다. <투란도트>의 음악감독 주재영의 뛰어난 연출이 입소문을 타, 재공연 문의가 빗발쳤다.

 덕에 11월 공연이 기획되었다.


3월 공연의 주조연들은 계획에 없던 재공연에 다른 일정들이 있어서 참여 못했다. 그래서, 대규모의 오디션이 있었다.

유진은 류 역할에 도전했다. 미나는 투란도트 역할에 도전했다가 감독으로부터 류 역할로 제안받았다. 재영은 유진에게 살을 빼고 오면 좋은 역할을 주겠다며, 3월에 맡았던 군중 코러스 역할에서도 제외시켰다. 유진의 성량이  풍부해서 코러스에서 좀 튀는 감이 있었다.


유진은 무대 의상신발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오페라 사무실까지 가려면 바빴다. 지하철로 열네 정거장. 2호선을 타야 한다. 유진이 지하철 칸에 접어들자, 승객들과 눈이 자주 마주쳤다. 커다란 체격에 여행 가방을 끄는 유진은 눈에 띄었다. 특히, 유진의 가슴에 사람들의 눈이 꽂혔다. 비현실적으로 큰 가슴이었다. 커다란 풍선 두 개가 가슴 위에 떠있는 것 같았다. 진은 자신의 신체 조건 때문에 옷을 맞추어 입었다.

 오후 3시 30분이라 전철에 빈자리들이 눈이 띄었다. 유진은 여행 가방을 앞에 세워 놓고 앉았다. 유진 옆에 앉은 할머니가 유진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유진을 바라봤지만 유진은 의식하지 않은 채하며 맞은편 창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결국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와, 기운이 아 보여. 살만 빼면 엄청 예쁘겠다. "

유진은 옆 좌석 할머니에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을 평소에 많이 들어 별 감흥이 없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그냥 통과. 살이 쪄도 괜찮다는 말로 해석하자. 유진은 기분이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유진은 <노래에 살다> 오페라단 건물 1층에 있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재영이 유진을 반갑게 맞이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얼떨결에  오른손을 꽉 잡아 악수를 했다.


"와, 손 힘이 강하네요."

재영의 말에 유진은 당황하며 얼른 손을 놓았다. 긴장한 탓에  손에 힘을 주었나 보다.


재영은 긴 팔 검은 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양모 체크 목도리를  둘렀다. 재영은 키가 크고 수더분한 이미지를 가졌지만, 친절한 완벽주의자였다.

 재영은 오페라 배우로 활동하다,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와 음악 감독이 되었다. 그의 배우로서의 경험은 무대에 반영되어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재영은 꼼꼼하게 배우들의 연기를 모니터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 시간이 얼마 없어요.

여기서 류의 대표 아리아 한 곡을 부르고,  대극장으로 가서 무대에서도 불러 봐요.

일단 <왕자님, 들어주세요> 불러 보세요."


유진은 다급해하는 재영이 요청하는 대로 자세를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왕자님, 들어주세요.

류는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입니다.

가슴으로, 입으로

얼마나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걸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유진은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맞히는 것에 도전하는 칼라프를  애절하게 말리는 류의 감정을 소리와 동작으로  잘 표현했다. 칼라프는 수수께끼를 맞히면 투란도트 공주와 결혼하지만, 못 맞추면 수형을 당한다.


"그만, 됐어요. 좋군요. 나무랄 데 없네요."

 재영은 노래를 다 듣지 않고 끊었다.

재영은 유진에게 무대 의상을 입고 대극장으오라고 지시를 내린 후 사라졌다.

유진은 기뻐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3월에 밟았던 무대에서  이젠 여자 조연으로 연기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꿈같이 느껴졌다. 

'아직 결정된 게 아니야. 잘해보자.'

유진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분장실로 향했다.


'맞는 옷은 있을까?’ 

 대극장으로 가면서 재영은 의상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의상 담당자는 황을 듣고 놀라,  대극장의  분장실로 오기로 했다.

유진이 대극장 무대에 서서 가져온 류의 옷을 입고 두 번째 아리아 <얼음 같은 공주의 마음도>를 불렀다. 재영이 보기에 유진이 가져온 옷은 전체 출연자들 의상색상이 맞지 않았다. 어쨌든 고문하는 투란도트 공주에게 칼라프의 이름을 비밀로 지키며, 류는 아리아 가사처럼 피곤에 지친 눈을 감았다. 진의 아름다운 아리아와 연기가  무대 전체를  장악했다.


재영은 유진이 류 역할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재영은 오디션이 끝나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유진도 오디션이 통과했다는 사실에 얼굴을 가리고 무대에 서 있었다. 펑펑 울고 있었다.


"유진 씨, 분장실에 의상 담당자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만나고 가세요. 새로 옷을 맞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일단 가져온 옷을 고쳐서 입어요.  모레쯤 새 옷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네"

"내일은  오전 9시까지 꼭 와야 해요. 나는 처리해야 일이 있어서 이제 갈게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유진은  분장실로 가는 길에 유명한 칼라프의 아리아 첫 소절이 떠올랐다.


"아무도 잠들지 마라, 아무도 잠들지 마라."

 유진은 칼라프의 아리아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걸었다.

'잘 수 있을까? 내일이면 나의 운명이 바뀔까?'

유진은 뛰는 가슴을 오른손으로 누르며, 손으로는 류 의상인 긴치마를 걷기 편하도록 들어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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