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독재, 직권남용, 직권남용"
현미는 외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거실 소파에서 좀처럼 일어나기가 어렵다. 내란 수괴를 배출한 제2당 의원들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 결정에 항의하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검찰이 윤석열이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체포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공소장에 적시했다는 속보도 뜬다.
현미는 깜박 잠이 들었다. 광화문에서 약속이 있어서, 맞춰놨던 알람 소리를 듣고 깼다. 무심히 리모컨을 눌렀다가 TV 앞에서 떠날 수가 없다.
저들은 결국 계엄을 지지하고 있다. 계엄 해제 국회 투표에 참여 안 한 국회의원들도 독재를 싫어하나 보다. 상대를 비난할 때 독재라는 말을 쓴다. 한 팔을 들고 박자에 맞춰 흔들며 떼 지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저들은 계엄이 내렸던 밤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현미는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세상에 옳고 그름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위와 아래, 오른쪽 왼쪽이 없이 뒤죽박죽이다.
현미는 황당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다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서 꼼짝도 할 수 없이 마비되는 것 같다. 자신의 이익에 염치없이 적극적인 사람들에게 현미의 삶에 대한 의욕이 꺾이고 있는 것을 느낀다.
현미는 내란죄를 지은 사람을 쫓아내고, 선거해서 다시 대통령을 뽑으면 그만일 텐데, 왜 탄핵절차를 무력화하려고 하나 이해하려 했지만, 곧 미친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권력욕 때문에 다 같이 미쳤다는 생각만 들었다.
현미는 몇 수를 내다보는 저들이 밉고 싫었다. 그래서 채널을 돌리니 계엄군이 준비했던 체포 도구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망치, 송곳, 밧줄, 안대, 케이블 타이, 야구 방망이...
현미는 도대체 삶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대명천지에 일어난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회의원들과 선관위 직원들을 안대를 씌우고 손발을 묶어 체포해서 구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단다.
현미는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부부동반 모임을 가려면 머리도 감아야 하고 화장도 해야 하는데 벌써 지쳤다. 소파에서 엉덩이를 간신히 뗐는데 이번에는 현미의 왼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여의도에서 윤석열을 탄핵소추하는 국회결의를 보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남편과 윤석열의 저항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대통령 권력이 성에 안 차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은 항상 현미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헌법재판소를 무력화시키려 하는 계획이 있다. 친위 쿠데타가 실패하니까 2년 5개월의 남은 임기가 이젠 아쉬워 보이는 것 같다. 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 같다. 현미는 윤석열의 마음까지 헤아리기 힘들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말은 그럴듯한데 따르는 행동들이 반대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참 그럴듯한 말인데 아내에게 무턱대고 충성한다.
헌법을 수호한다고 했는데 헌법에서 내란죄라고 명시되어 있는 일을 태연히 자행하고도 반성이 없다.
문 대통령의 정부에 대해 5년짜리 정권이 뭐라고 겁이 없다고 떠들었는데, 그의 마음속에 5년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영구집권할 계획을 세웠다. 계엄령을 내려서 마음에 안 든 사람들을 쓸어버릴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군대보다 출동이 재빨랐던 국회의원들 때문에 실패하니까, 단순히 야당에 대한 경고였다며 없던 일로 한단다. 그럼 정권을 잡을 때 동지였던 한동훈 여당 대표는 왜 체포를 지시했을까?
윤석열은 대한민국을 상속받은 것처럼 보인다. 마구 말아먹는다. 현미의 기억에는 분명히 1퍼센트도 안 되는 차이로 대통령이 되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왕이었던 것처럼 군다.
사시 9 수생 동안에도 왕이었나. 서교동에 있던 독서실에서 술 마시고 돌아다녔다는 소문도 들었다. 사시 건달이 왕이 될 상이라며 용안이란다. 대통령이 왕인가? 별인가?
"이런 엉터리가 있네."
오늘로 24일이 지났다. 평범한 대한민국 주부인 현미는 2024년 12월을 이상한 인간에게 빼앗기고 있다. 현미는 억울하다. 자신이 뽑지 않은 괴물을 견뎌야 한다. 손바닥에 쓰인 작은 왕자가 그냥 글자가 아니었다. 윤석열의 정체성이었다. 사과는 개한테 줘버린다. 왕은 무엇을 해도 다 옳으니까 국회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도 고도의 통치행위란다.
현미는 '고도의' 란 표현에 실소가 나왔다.
"풋. 블랙 코미디다."
이제는 정말 약속이 늦기 때문에 현미는 TV를 껐다. 마룻바닥에 붙은 왼발을 간신히 떼서, 걷기 시작했다. 화장실 세면대로 가서 세수를 했다.
'고도의'란 말은 뭔가 있어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땅에 붙어 있는 인간보다 많은 것이 보인다는 뜻인가?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하면서 현미는 하루가 이제야 시작되는 것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세수물이 쓸어간다.
나는 아무 힘이 없는 주부인데 왜 이렇게 계엄령에 민감할까. 왜 정치 뉴스를 하루 종일 틀고 있나.
현미는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현미는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고 화장을 시작했다.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다 기침을 했다.
"쿨럭쿨럭쿨럭"
기침을 한참 한 후
"카약 "
현미가 아픈 목구멍에서 티슈로 피 묻은 가래를 뱉고 난 후 기침이 멈추었다.
지난번 여의도 집회에서 감기가 걸렸다. 한 해 동안 바빴었다. 탈진해서 12월은 겨울잠 자듯 쉬고 싶었는데, 12월 3일 계엄령이 내려졌다. 계엄령이 해제된 후 계속 잠을 설친다. 대통령을 탄핵 소추해도 내란은 진행 중이다.
거울 속 얼굴에 다크 서클이 두 눈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왼쪽 입술 끝은 갈라져서 딱지가 앉아 있다. 입술을 벌릴 때마다 아프고 딱지가 떨어져 여러 번 피가 나다 멈추다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작은 딱지가 안정적으로 붙어 있다. 현미는 다크 서클을 감추기 위해 메이크 업을 시작했다. 파운데이션을 붓으로 균일하게 얼굴에 바른다. 붓으로 얼굴을 터치할 때 눈 밑 주름이 더 짙게 드러나는 것 같아 멈춘 후 팩트로 톡톡 두드린다.
현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답답하다.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견딜 수밖에 없다.
계엄령이 내리고 해제되는 동안 현미는 대학을 다닐 동안 맡았던 최루탄 냄새와 따가왔던 피부의 느낌이 살아났다. 현미는 천수를 누리다 죽은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
'뚜전'이라는 단어도 떠올랐다. 시각을 알리는 '뚜' 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이란 말로 뉴스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관악 캠퍼스의 아크로 폴리스에는 항상 하얀 티에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고, 머리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계엄령을 내리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권력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현미가 다녔던 단과대학의 같은 학번 남학생은 운동권 서클에 참여하다 군대에 징집되었는데, 일 년도 안되어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돌이켜 보면 겨우 21살이었다. 재수해서 현미보다 한 살 많았던 학생이었다. 갈색으로 곱슬거리게 파마한 머리는 그의 큰 키를 더 크게 보이게 했다. 좁고 긴 얼굴에 쌍꺼풀이 큰 눈, 밝은 갈색 눈동자, 높은 콧날이 선 코, 작지만 도톰한 입. 면도를 깔끔하게 하지 않아 짧고 거친 수염들이 삐죽삐죽 보였다. 피부는 햇빛에 탄 구리 빛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해 외국인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같은 과 학생은 아니었지만, 사범 대학이라 교육학 계통 과목들을 함께 많이 들었었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좋은 국어 선생님으로 잘 살았을 텐데.
현미는 더 이상 늙지 않은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안타까웠다. 이제는 현미의 자녀보다 어려서 소년처럼 느껴지는 청년의 얼굴.
수십 년간 잊었던 얼굴이 이렇게 뚜렷하게 떠오르다니.
처음 그의 얼굴이, 체크 남방이나 티에 주로 청바지를 입었던, 이름을 잊어버린 그의 모습이 떠올랐을 때, 현미는 당황했다. 그가 군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과친구들이 진심으로 슬퍼 울먹였던 기억이 현미의 뇌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계엄이 선포된 날, 봉인이 해제된 얼굴은 현미 기억의 수면 위로 자리 잡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유난히 대학생들이 군대에 가서, 의문사를 많이 당했던 시절, 학생식당이나 도다부, 버들골에서 학생들이 모여 있으면 테이프를 파는 사람으로 변장한 사복 경찰들이 대화를 엿들으려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들을 학생들은 짭새라고 불렀다. 짭새들이 판치는 캠퍼스였다. 새판이었다고 할까.
정부의 충견들이 학생들을 위협했으니 개판이었다고 해야 하나. 현미는 더러운 새판 개판 같은 세상을 어설프게나마 경험했다. 그 야만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박종철, 이한열 열사에게 마음의 빚을 가졌다.
현미에게는 백골단의 침입, 의문사와 사복 경찰들의 염탐과 감시, 고발 등 다양하지만, 끔찍한 계엄 후과가 정리된 기억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엄의 의미는 최루탄 가스의 감각으로 현미의 몸에 남아 있었다. 눈이 쓰라리면서 콕콕 쏘는 듯 아프고, 엉겁결에 손으로 눈이라도 비비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있었다. 눈물이 나면 그 길을 따라 피부가 화끈거리며, 견딜 수 없게 따가워진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동안 내내 맵고 아린 통증이 머물렀다. 특히, 목과 귀뒤 피부가 땀이 나면서 머리카락에 남았던 최루가스와 결합해서 더 쓰라렸다. 집에 돌아와서 씻기 전까지, 계속 재치기를 한 날이 셀 수 없었다.
집에 와서 머리를 감을 때 온 얼굴과 손이 아스팔트에 쓸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흘러내리는 비눗물을 따라 몸에도 통증이 따라 흘렀다. 매캐한 냄새는 집까지 따라와 가족들까지 재채기를 했었다.
입었던 옷들도 세탁하지 않으면 다시 입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다시 그 시절을 경험하게 해서는 안돼. 소수의 욕망을 위해 많은 이들이 자유와 목숨을 잃는 야만의 시대.
현미는 화장을 끝내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바깥공기는 찼지만, 해방감을 주었다. 현미는 하루종일 집에서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 현미는 집 밖에 나오자 나쁜 역사들이 과거에 남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계엄령은 유혈 사태 없이 민주적 방법으로 해제되었다.
12월 4일부터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감사해야 하나.
현미는 오늘 만남에 대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곧 만나는 부부는 싱가포르에서 3주 정도 휴가를 얻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고 들었다. 남편이 반가워서 저녁 식사 초대를 했다고 현미에게 늦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현미는 약속 덕분에 하루종일 느꼈던 절망감과 무기력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남편의 대학 후배 부부와 대화하면, 외국에서 지금의 한국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론을 통해 이 기괴한 상황들이 국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현미는 알았다. 그래도, 직접 들으면 외국의 시선이 더 체감이 될 것 같았다. 특히 후배의 아내는 외국 통신사의 편집자여서 현미는 더 궁금해졌다.
현미는 아파트 남문을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 건널목 앞에 섰다. 길 건너편 사람들의 모습들은 평상시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아이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 있다. 하얀 비숑이 갈색 양털 뽀글이 감에 은색으로 빛나는 날개 달린 옷과 빨간 털신을 신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비숑의 목줄을 잡은 긴 패딩을 입은 주인은 미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눈길을 아래로 보고 있다. 옆에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 노인들이 가까이 서서 구부정하게 신호등을 바라봤다. 일상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현미도 자신을 아래로 내려 보았다. 폭넓은 청바짓단 아래 투명한 인조보석이 박힌 자신의 신발들이 반짝이고 있다.
신호등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현미는 왠지 기분이 밝아졌다.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현미도 길을 건넜다.
"평범하고 자유로운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나라가 안정되겠지. 지금이 계엄 상태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야"
현미는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순간 빙긋 웃음이 현미의 얼굴에 떠올랐다. 현미는 익숙한 길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