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는 카페 2층 창가에 앉아 유자 카모마일티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본다. 카모마일티를 마셔도 마음이 잘 진정되지 않는다. 그나마, 유자의 향긋한 향이 억울한 기분을 가라앉혔다.
삑, 삑. 핸드폰이 울린다. 오후 3시 2분이다.
여의도 집회 관련 인파 밀집으로 14:58부터
여의도역(5호선)을 상. 하선 열차가 무정차 통과 중입니다
열차이용에 참고하세요. [서울교통공사]
안전 안내 문자가 핸드폰에 뜨기 시작했다. 오늘은 12월 14일 토요일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김장을 하기로 한 날이다. 현미는 최근의 계엄 사건 이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김장도 2~3주 미루기로 했다. 뭔가 불안하고 편안하지 않다. 잠을 자주 설쳐서인지 정신도 맑지 않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느낌이다.
오늘도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인파가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다. 지난주보다 더 많아 보인다.
현미는 남편 경수와 9호선 석촌역에서 여의도역까지 급행열차를 타고 왔다. 전철은 사람들로 꽉 찼었다. 고속터미널 역쯤에서 전철칸에 더 타려는 사람들을 향해 승객 중 누군가가 "이태원 참사 나요"라고 외쳤다.
'이태원 참사라.....'
현미는 숨 막히게 승객들과 밀착되어 이리저리 밀렸다. 그러다, 전철 손잡이를 잡은 경수에게 기대어 경수의 허리를 꼭 잡고 있던 현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윤석열의 기괴한 행동 중 하나가 떠올랐다.
거대한 국화 다발에 고개를 숙이고 참배하던 모습,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도, 위패도 없던 분향소에 누구를 위해 조문하는지도 모르겠던 모습...
그때 구천을 떠돌던 악령들이 다 윤석열의 몸으로 들어갔나 보다. 그는 분명 악귀들에게 조문했으리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게는 분명히 이름이 있었다.
현미는 2022년 12월 16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49재 행사에 참여했었다.
49재 행사에서 유족들은 죽은 젊은이들의 평소 사진을 스크린 위에 띄웠다.
"아, 한 명 한 명이 아름답고 훌륭한 청년이었구나."
현미는 젊은이들의 모습들을 보는 순간 감탄이 나오며, 소중한 생명들이 사라진 것이 아까웠다. 유족들은 얼마나 희생자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까? 얼마나 보고 싶을까를 생각하니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20대 자녀들을 둔 엄마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희생자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섞여 있었다. 먼 타국 땅에서 어떠한 이유로 왔는지 모르지만, 10월 29일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참여하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윤석열은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거대한 국화꽃무덤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의도하는지 모를 향을 피웠다. 희생자들을 지우기 위해 만든 절화 무덤과 책임지기 싫은 마음을 가리기 위해 뿌옇게 빈소를 채우는 향을 현미는 방송을 통해서 보았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마음을 짓밟고, 마음에 대못을 박고 있었다.
TV를 향해 현미는 소리쳤다.
"미쳤구나. 인간이야? 159명의 젊은이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죽었어.
서서 죽거나, 넘어진 상태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눌려서 숨을 못 쉬고 죽었어."
참사 직후 뉴스에서 방영되었다가 사라진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던 영상들도 현미의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언론은 침묵 속에서 애도하자며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나쁘다는 걸로 몰고 갔다. 경찰들이 평소대로만 거리를 통제하고 관리했다면 막을 수 있는 희생이었다. 정부는 어떤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으며, 애도를 가정한 입막음을 강요했다.
윤석열이 내린 계엄 포고령을 생각하니 지옥문이 열리는 것을 시민과 국회가 막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12월 3일 계엄 시도는 2시간 만에 끝났지만 현미는 새벽까지 잠을 못 잤다. 윤석열이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를 받아들인 다음에야 안심하고 잠을 청했다.
12월 4일에는 문학 수업이 있었는데 7명 중 제대로 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 멍하고 피곤한 상태로 45년 만에 계엄이라는 미친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휴, 우리 숨도 못 쉴 뻔했어. 나는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데 말 못 해서 우울증 걸리거나, 아님 잡혀가서 벙커에 갇혔을 것 같아."
곁에서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경수는 속삭이는 현미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제 곧 내려야 해. 2시간 일찍 도착했네. 좀 있으면 지난번처럼 무정차 통과할 거야."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의도역이었다. 이미 국회의사당 앞은 사람들로 북적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우리 밥부터 먹고, 카페에 자리 잡자. 나는 왔다 갔다 할 거야."
현미는 지난주 인파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8년 전 스무 차례나 촛불 집회에 참여했을 때는 길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쳐도 힘들지 않았었다.
이젠 세월이 흘러서인지, 정치에 혐오를 느껴서인지 적극적으로 참여할 에너지가 없어졌다. 오늘도 경수가 같이 가자고 여러 번 말해서 따라나섰다. 현미는 자신의 권력욕만을 추구하며 국민의 자유 따위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인간들에게 황금 같은 주말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쁜 놈들한테 이중으로 시달리는 느낌이었다.
12월 3일 이후로 일상이 깨어졌다. 피곤하고, 어깨에 짐이 하나 더 얹어진 느낌이다. 집회에 나와서도 무력감도 들었다. 특히, 지난주 토요일인 7일, 국회의 첫 탄핵 소추 회의에서 정족수 미달로 투표함도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감이 컸었다. 현미는 그날 전철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수많은 탄핵 집회 참여자들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작은 스티로폼 방석을 깔고 길바닥에 앉고 싶지 않았다. 경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결국, 현미는 카페 안에서 테이블 없이 의자 하나를 구해, 커피와 티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작은 카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추위를 피해 온 사람들로 번잡했다. 창을 통해 탄핵을 원하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을 구경하며 현미는 핸드폰에서 브런치 앱을 열어 글을 썼다. 경수는 잠깐씩 현미에게 집회 상황을 설명하거나, 바깥 집회에서는 통신이 터지지 않아 새로운 소식을 검색하기 위해 카페로 왔다. 경수의 얼굴과 손은 추위로 발갛게 얼어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리를 채운 젊은이들은 중늙은이 부부와는 달리 추위를 덜 느낀다고 현미는 생각했다. 갑자기 픽 웃음이 나왔다. 중늙은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다니. 친한 친구가 농담처럼 "꽃샘추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12월 7일은 겨울이었고, 얼어 죽을 것 같이 추웠다.
현미는 젊은이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추운 겨울에 가뜩이나 취업도 힘든 시대에 과거의 나쁜 유물인 계엄이라니.
이젠 자유까지 빼앗겨야 하나. 어떤 기준으로 선량한 시민과 반사회 인물을 구분하나. 누구의 잣대로. 지금 집회에 참여한 현미 자신이 계엄령을 어긴 자가 되어 영장 없이 체포될 수도 있는가.
뇌가 알코올에 절여진 대통령으로 불리던 자의 무모한 권력 놀음에 평범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다.
"이제 두 번째 탄핵 소추 회의다.
오늘은 제발, 제발 되어야 할 텐데."
이층 카페에 추위에 떨어 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수도 통신이 터지지 않자 실시간 국회 상황이 궁금해 거리에서 들어와 현미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와이파이 번호 알아? 버퍼링이 심하네."
경수의 물음에 현미는 대답을 못해 주저했다. 오늘도 지난번처럼 글을 쓰느라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미처 확인 못했다.
"HollyOOOO예요."
옆 좌석에 뱅머리 스타일을 한 세련된 여자가 알려줬다. 옆 좌석의 여자도 남편과 내란범의 탄핵촉구 집회에 참여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되고,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현미는 글을 쓰다 쉬고 있을 때 들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회로 가는 도로까지 사람들에게 점거되었다.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손에는 종이 카드나 응원봉을 들고 있다. 종이 카드에는 '내란 수괴 윤석열을 탄핵하라."라고 적혀 있다.
현미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반추해 보았다. 12월 3일 오후 11시쯤 처음 대통령 계엄 선포 영상을 볼 때 장난처럼 여겨졌었다. 현미는 TV에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탄핵 소추 국회 회의가 열리려면 15분밖에 안 남았다. 카페의 사람들은 손을 가슴에 얹고 있거나 떨린다고 서로 소곤거렸다.
12월 12일 윤석열이 4번째 담화문을 읽었을 때, 현미는 그가 악귀가 들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고는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지 두 눈과 두 귀를 의심했다.
"두 시간짜리 계엄이 어디 있습니까?
국회의원들이 회의장에 다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윤석열은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실패한 계엄에 대한 자기 합리화였다. 만약 국민들과 국회의원들이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으리라. 그래서, 숨 막히는 지하철을 타고 모두 여기 왔다.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로 올 때, 현미는 지하철 안에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차서 원치 않은 스킨십을 하게 된 여자의 외치는 소리도 들었다. 못 견뎌서 외치는 처절함이 담긴 소리였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요."
잠깐 침묵이 있은 후 작은 목소리로 여자 옆에 있던 남자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제 자리에 와보세요. 안 밀릴 수가 없어요."
아무런 대답이 없이, 달리는 전철 소리가 들렸다.
현미는 그때 한 번 더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 지금 이 복잡한 지하철 안보다 밀도가 훨씬 높았으리라. 벌써 2년이 지났다. 49재에 참여한 지도 꽉 찬 2년이 되려면 이틀 밖에 안 남았다. 행정안전부 장관은 계엄 실패 후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다는 말을 하며 사표를 내고 떠났다.
국회의원들의 투표가 시작되었다.
현미는 45년 전 천진하게 떠들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대통령은 하나뿐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초등학생이면서도 친구들과 나라 걱정을 했었다.
계엄 실패 후 탄핵을 위해 20대들이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그들이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사회가 그래도 상식적이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현미는 이제야 자유가 공기처럼 존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현미처럼 태어나서 방송에서 본 대통령이 한 명뿐이거나 계엄을 선포하고 양민을 학살하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현미는 광주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학살을 체험한 것은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서였다. 현미는 정대의 영혼이 되어 불타 없어지는 시체의 탑을 보았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 모습이 윤석렬이 계엄을 실패하고, 국회가 반란 수괴를 탄핵 소추하는 장면과 겹친다. 일부러 영화에서 오버랩시킨다면 과장스럽고 억지스러운 연출일 것 같은 장면들이 동시에 TV에 방영되고 있다.
"이미 대통령인데 왜 내란을 일으키겠나?"
현미는 도무지 이미 대통령인데 왜 군대로 국회와 선관위를 장악하려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광대처럼 어퍼컷을 하며 한 표라도 끌어 모으려고 하지 않았나? 고작 1퍼센트도 안 되는 표차이로 당선되지 않았나? 손바닥에 한자로 왕자를 써서 토론을 하더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왕이 되고 싶었나?
TV패널로 나온 변호사의 답은 명쾌했다.
"교과서적인 친위 쿠데타입니다. 권력을 극대화하고, 장기적으로 집권하기 위해 일으키는 겁니다."
"와!"
카페 전체가 탄성과 박수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탄핵되었어."
경수가 소리쳤다. 현미는 오른손을 들어 경수와 손바닥을 부딪쳤다. 옆 자리 부부는 서로 껴안았다. 카페 사람들은 처음 본 사이지만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다 같이 기뻐했다.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였다.
현미는 벗어 놓은 패딩을 입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응원봉의 스위치도 켰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아 불빛이 눈에 띄지 않게 반짝거렸다. 밝음 속에서도 빛은 보인다.
현미와 경수는 카페에서 나와 군중 속에서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불렀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무리 속에서 머물다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전철역 앞에 줄들을 끊임없이 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사람들로 밀도가 높아,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현미는 이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은 한 알코올 중독자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차분하고 평화롭게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현미와 경수도 탄핵 축하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줄을 서기 시작했다.
"대단해. 0.73퍼센트 차이로 선거에서 이기고 왕이 되려고 계엄령을 내린 사람이나, 이 추위에 몇 시간을 추위에 떨며, 자유를 지키려는 국민이나."
"이제 시작이야. 순순히 내려올 리가 없지."
경수는 얼굴을 찌부리며 미소를 거두고 대답했다.
"맞아. 대통령 권력도 성에 안 차서 계엄령을 내렸으니."
현미도 맞장구쳤다. 권력욕만으로 똘똘 뭉친 내란의 수괴가 떠오르자 기분이 나빠졌다.
"악귀가 들렸어. 왜 자꾸 국화꽃 무덤이 생각나는지."
현미는 조금씩 줄어드는 줄을 따라가며 지하철역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았다. 이유 없는 애정이 불쑥 마음을 채웠다.
"오늘 할 일은 이루었으니까 내일은 내일대로 흘러가겠지."
현미와 경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왔다. 플랫폼에서 다시 긴 줄을 섰다. 두 사람은 집으로 가는 길에도 만차인 지하철 안에서 간신히 서서 갔다. 현미가 주위를 돌아보니, 지하철 승객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