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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Nov 29. 2024

<우정과 우정 사이>

 현주는 햇빛을 피해 창가 자리에서 핸드백을 들고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햇빛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눈부시게 자신을 비추는 게 싫었다. 얼굴의 광대뼈 위에 자리 잡은 기미가 더 짙어질까 걱정도 되었다. 현주햇빛 쬐는 것을 정말 좋아했었다. 그래서,  양산이나 모자를 쓰지 않고 산책했었다. 이제는 삼사십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은은한 빛이 있는 카페 실내 공간이 편한  나이가 되었다.


현주 나에게 보내는 카톡에 본인의 심경을 쓰기 시작했다.


 '어제 정미를 만나서 충분한 조언을 했고, 이제 정미가 결정하면 돼.

이번 일을 통해서 나는 확실히 정미랑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

충고하는 과정에서 공격을 받았는데, 내가 질색으로 여기는 태도야.

내가 며칠 밤을 설치는 바람에 남편이 정미 일에 신경을 특별히 써줘서 상황이 좀 안전해졌어. 친구로서 책임과 역할은 여기까지면 된 것 같아.'


 카톡을 쓰는 것을 멈추고 현주는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번 해는 낙엽이 아름답지 않았다. 재작년에는  꽃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풍이 들었지만, 작년은 그저 그랬다. 풍경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올해만큼 흉하지는 않았다. 올해는 이상 고온 탓인지,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변하며 바싹 말라 떨어졌다.


'친구와의 우정도 여름의 짙푸른 잎들처럼 싱그럽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다 찬 바람이 불어오면 지금의 잎처럼 시드는 걸까?'


 현주는 카톡을 더 쓰려다 자신의 인연들로 만들어진 모임을 탈퇴하려는 결심이 좀 안타깝게 느껴졌다. 현주의 고교 동창, 대학 동창, 헬스클럽 동생 넷으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만남을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창가에 앉은 네 친구들이 테이블 위 디저트를 나눠 먹으며, 깔깔거리고 수다를 떠는 모습이 창밖 풍경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현주는 따뜻한 카페라테를 두세 모금 더 마시고 다시 에게 보내는 카톡에 글을 올렸다.


'인이는 매우 힘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미와 우정을 지속하는 것은 존경스럽고 감탄스럽다. 나는 다르다. 이번 정미의 공격 아닌 공격을 받으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이고, 친구를 통해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지는 것을 나는 통제하고 싶지 않아. 다만, 인영이와 정미의 계약관계에서 나도 백분의 일이지만 힘들었어.'


 현주는 4년 전 고등학교 동창인 정미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결별을 선언했던 기간을 떠올렸다. 현주 대학 동창인 인영은 셋이 같이 산책할 때의 유쾌한 분위기를 그리워했다. 현주정미의 오랜 우정은 한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달라서 깨어졌다.

인영이 안타까워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현주정미를 좋아했지만, 한 번씩 과격해져,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뱉는 태도에 거리를 두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자신의 부부가 정치인 누구를 싫어한다고 했을 때, 정미가 한 말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판사 20년 했다는  남편의 판단력이 왜 그 모양이니?"


충격적인 말이었다. 현주집으로 돌아오면서 정미와의 결별을 결심했었다.

현주가 그만 만나자고 정미에게 카톡을 보냈을 때 정미는 당장 사과했다. 정미도 말을 해놓고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현주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은 2년 이상 만나지 않았다.  인영현주 정미가 만나지 않는 동안  정미와 전세약에 얽혔다. 정미가 전세가 만료되어 새 전셋집을 찾고 있었다. 마침 인영기존 전세계약을 끝내고 시어머니 집으로 입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어머니 집에는 월세입자가 살고 있었는데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해서 이사 가기로 되었다. 인영은 단순하게 복비도 아낄 겸 자기 집에 정미가 들어오면 되겠다고 무심코 툭 한 마디 던졌다. 정미는 순식간에 실행에 옮겼다. 공인중개사에게 연락해서 얼른 인영의 집을 보러 갔다. 정미는 깔끔하고 인테리어가 잘된 인영의 전셋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아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인영의 집주인과의 계약을 서둘렀다. 인영은 시어머니의 월세입자가 나가는 날짜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집을 비워주는 계약을 먼저 했다. 

시어머니 집의 세입자는 계약 기간보다 빨리 나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전세 보증금 액수가 적어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지 못해 결국 원래 계약기간까지 살게 되었다. 인영은 결국 12월 30일에 자신의 이삿짐을 이삿짐센터에 맡기게 되었다. 가장 필요한 가재도구들만 가지고 단기 임대를 살게 되었다. 인영은 투룸 빌라를 단기 월세로 계약해서 지내다 다음 해 3월 1일에 시어머니 집에 들어갔다.


 현주는 그때 느꼈던 미안함과 참담함이 한 번씩 떠오를 때마다 인영의 인간됨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영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정미와 연락을 취했다. 정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경솔했던 인영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현주인영단기 임대로 사는 동안 매일 만나 같이 산책을 하며 인영의 기분을 살피느라 애썼다. 인영은 낯선 환경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남편과 아들의 원망을 들었다. 게다가 층간 소음 때문에 사랑하는 강아지 미미도 다른 집에 맡겼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한약까지 지어먹으며 시어머니 집이 비기를 기다렸다. 그랬던 인영이 시어머니 집에 입주 후, 석촌 호수를 같이 산책하다 현주에게 말했다. 정미의 생일 즈음이었다.


"정미가 카페에서 를 만나고 싶어 기다리고 있어. 이제 화해하고 같이 만나자."


인영이 화해를 권했을 때, 현주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인영은 마치 말썽쟁이 같은 반  중학교 2학년 여학생 두 명을 화해시키는 담임 선생님 같았다. 인영이 30년을 교직에 있다가 은퇴한 선생님이어서 둘을 화해시키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친구는 사이좋게 지내야 하니까.


현주는 그때 정미와 화해하지 않았다면 자신과 남편이 부채가 많은 집에 전세를 들어가려는 정미를 위해 이렇게 신경 쓰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처럼 도울 수도 없고, 대신 상처도 안 받았겠지.

현주카톡에 글을 쓰며 마음을 정리했다.


'나는 <투데이> 모임에서 탈퇴할 거야.

같이 만날 기회가 되면 만나기는 할 거야.

셋을 모두 좋아하고 친구라고 느끼지만 각각의 관계들이 미묘하게 달라. 나는 내 방식대로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현주는 이 글은  <투데이> 모임 카톡에 공유할 생각이었다. 공유하기 전에 어제 정미가 보낸 카톡을 읽어 보았다.


"현주야, 우리 남편이 고맙다고 전해달래...

대출이 많아 불안한 계약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전하게 되게끔 장치를 만들고 이사 가게 되어서.

경우 씨 말대로 우리 전세 사기 피해자 될 뻔했어.

이삿날은 잡혀서, 살던 집을 비워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집주인은 뜬금없이  원래 했던 말과 다르게 대출을  일부만 갚는다고 하니까.

경매 시 아무 보호도 못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이사했어.

그저께 경우 씨가 보내준 판례가 큰 힘이 되더라. 우리 일로 일찍 출근해 판례까지 찾아보다니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너에게 뾰쪽하게 말해서 미안해."


 현주는 그 글들을 서너 번 반복해서 읽었다. 얼굴이 찡그려지고 짜증이 났다. 몇 날 밤을 걱정으로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다. 아들이 셋이나 되는 정미가 전세 보증금운 나쁘면 날릴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변호사남편 경우가 정말 고마웠다. 정미가 당황해서 자신을 신경질적으로 대했던 상황들도 떠올랐다.  


'친구로 하긴 버거운 친구다. 가족도 아닌데 애증에 얽히는 게 싫다.'


현주번에는 확실히 정미에게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현주는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해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정미에게 카톡으로 간단하게 썼다. 


"좀 화났어"


"화 풀어. 미안해"


정미의 미안해하는 표정이 본 듯이 떠올랐다. 전에도 이렇게 사과했었다.


"일단 네 일에 집중해. 바빴겠다. 이사하느라."


"알았어. 근저당 말소 확인하고 에스크로 계좌도 처리해야지."


 에스크로 계좌는 임대인이 약대로 해야만 돈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장치였다.

 이사를 한 후에 기존 근저당설정등기 말소를 확인한 후 임차인이 허락해야 임대인이 은행에서 전세 잔금을 찾을 수 있어, 임대인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현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도 친구에 대한 신뢰불안정했다.


"나중에 만약 안 좋은 일 생겨도 이 판결을 줘서 안전을 보장했다고 내 남편 하지 마.

너랑 실랑이하려는 게 아니야.

연루되어 조언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려는 거지."


"당연하지"


정미가 자주 쓰는 표현이다. 현주는 당연하지 않은 태도를 보인 오랜 친구에게 되받아쳤다.


"당연하지, 물론

너도 인정하다시피 네가 나를 날카롭게 대했으니까"


 현주는 카페에서 정미에게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털어놓은 뒤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다시 창 밖을 봤다. 창가에서 떠들던 네 사람들은 어느새 자리에 없었다. 바람 때문에 나뭇잎들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낙엽이 지면 나무는 홀가분하게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정미가 무사히 1순위가 되어 대항력이 생기면, 그때  <투데이> 모임 안 한다고 말해야지.'


현주는 핸드백을 들고 카페를 나섰다. 저녁 준비를 할 먹을거리를 사러 근처 시장으로 출발했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정미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정미는 지하철 노선으로 몇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갔다. 섭섭했다. 잠깐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16년을 바로 옆 단지에서 살았으니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정미의 고등학교 3학년 때 모습이 떠올랐다. 정미는 땡땡볼같이 통통 어다녔었다. 눈이 크고 코, 입은 자금 자금했다. 그래도, 웃을 때는 하얀 이들을 가지런히 드러내 입이 커 보였다. 작은 키지만, 호탕하게 웃었다. 머리는 커트를 쳤지만, 곱슬머리라  구불거렸다. 현주 정미가 베티 붑을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만화 주인공같이  귀엽고 밝았었다. 이제 정미는 머리를 길러  하나로 동그랗게 묶고 다닌다.

정미의 세 아들 중 막내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막내아들도 정미를  닮아 곱슬머리다.


'어릴 때부터 봤던 아이가 곧 대학을 가다니'

현주는 괜스레 마음이 밝아지며 미소가 입에 걸리자 당황스러웠다


"뭐, 친구 일이 잘되면  좋은 거지. 세월이 왜 이리 빠른지."


현주는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빠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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