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몇 시쯤 오실 거예요?"
핸드폰 너머로 예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선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여섯 시였다. 저녁 시간이었다. 지선은 다음 수업을 위해 이동하며 예진에게 말했다.
"엄마, 오늘은 늦을 것 같아. 전기밥솥에 있는 밥과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꺼내서 저녁을 차려 먹어."
"또?..... 네"
예진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선은 번번이 혼자 밥을 먹으라는 게 마음에 걸려 다시 전화했다. 이번에는 톤을 좀 높게 올리고, 더 다정한 목소리로 구체적으로 말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어묵탕을 맛있게 끓여 놓았으니까, 데워 먹어. 꼭 무까지 다 먹어야 한다."
지선은 예진에게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가 있나 체크하고, 평소처럼 읽던 책도 30 페이지 읽으라고 했다.
"네"
이번에도 예진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예진은 오늘도 혼자서 밥을 먹는 게 싫었다. 최근, 예진은 저녁 시간에 혼자만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지선에게 강아지를 기르자고 지속적으로 졸랐다. 하지만 지선은 지금 하는 일들이 많아서 강아지까지 돌볼 수는 없다고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예진은 자신이 중학생인데 강아지 하나 못 돌보겠냐고 투덜거렸지만, 지선은 비용 문제까지 들먹였다.
"강아지 키우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 줄 알아?"
지선이 그럴 때마다, 예진은 지선이 돈만 아는,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엄마는 돈이 다야? 돈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강아지 기르는 걸 돈 든다고 해? 길거리에 강아지 산책시키는 사람들 중에서 돈얘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지선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자신도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애완동물을 키우는 데 많은 돈이 든다는 걸 알았다. 이제 열네 살 된 딸에게 그 돈도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자신이 구차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 난 돈밖에 모른다. 돈 모아서 빌딩 사야지. 지금 이동 중이라 바빠. 끊는다."
예진은 밥을 차리면서 지선과 강아지 키우는 문제로 다투었던 일까지 떠오르자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 거실 현관문 옆에 놓인 피아노에 눈길이 닿았다. 피아노 위에는 테디베어 인형 한 쌍이 놓여 있었다. 검은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고 하얀 나비넥타이를 맨 밝은 베이지색의 신랑 테디 베어와 하얀 면사포를 드리우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쓴 순백의 신부 테디 베어 한쌍은 어두운 집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보였다. 관절을 굽힐 수 있게 손으로 정성껏 만든 테디 베어들은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예진은 저녁을 먹은 후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책도 30페이지 읽었다. 예진은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30페이지보다 더 읽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독일 여행 사이트와 미국 여행 사이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와 아버지의 짐들이 사라진 날을 예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5월 7일. 예진의 11번째 어린이날이 지나고 어버이날이 되기 전날이었다. 엄마와 자주 다투던 아버지가 웬일인지 재량 휴업일을 신청해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지선과 예진은 모처럼 행복한 기분에 들떴었다. 잘 생기고 멋졌던 아버지는 이제부터 셋이서 행복하게 지내자고, 밝게 웃으며 제주도 가는 비행기표를 내밀었다. 일단 예진과 지선이 먼저 떠나고, 아버지는 다음날 합류하기로 했다.
어린이날 여행을 기획하느라 힘들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분 좋은 몸동작이었다. 지선과 예진은 5월 4일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예약한 호텔 스위트 룸은 방이 세 개였다. 멋진 오렌지 색깔의 가죽 소파 세트가 거실 가운데 놓여 있었다. 3인용 소파 뒤 창가에 6인용 대리석 식탁과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식탁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예진이 기억하는 한 가장 넓고 환하고 럭셔리한 공간이었다. 욕실에 있는 욕조는 물을 받은 뒤 스위치를 누르면 기포가 일었다. 예진은 뽀글거리는 거품을 즐기며 공기 마사지를 받았다. 예진은 욕조에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욕조 앞에 놓인 커다란 거울을 보며 자신이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해, 피부만 노란 서양인이라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 것도 기억났다.
이제 예진은 정말 엄마만 닮고 싶었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5월 5일 어린이날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예진은 부모님들과 식물원도 가고, 테디 베어 박물관에 들려 다양한 곰인형들도 보았다. 아버지는 예진에게 엄마와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의미로 신랑 신부 테디 베어 한쌍을 사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버지는 제주 공항에서 지선과 예진을 배웅했다. 아버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 8일 어버이날 집에 도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버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공항 게이트로 들어가는 모녀를 향해 자동차 와이퍼가 움직이는 것처럼 두 팔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이 예진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
지선은 오후 10시쯤 집에 도착했다. 요즈음, 피아노의 인기가 과거 같지 않을 때, 수업과 연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것이 기적 같고 감사했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고단했다. 최근에 거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친정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갈까도 고민했었다. 다행히 오늘도 예중을 준비하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를 소개받았다. 지금 정도의 레슨만 유지한다면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지선은 하루하루가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에너지가 떨어져 자전거의 페달을 밟지 못하는 순간 아이와 자신의 삶은 넘어질 것이다.
남편은 4년 전, 5월 7일 젊은 미국인 아내와 한 살 난 딸과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지선은 독일 만하임에서 대학원을 진학했을 때 남편을 만났다. 다정했던 남편은 무릎을 꿇고 기다렸던 청혼을 했다. 지선은 그가 청혼 때 했던 말을 되뇔 수 있다.
"나의 부모는 날 버렸지만, 난 한국인이야. 너와 함께 한국에서 새 삶을 살고 싶어."
그랬던 그가 미국 교포 출신의 병원 동료와 어디론가 가버렸다. 남편은 새로 태어난 어린 딸을 위해서 독일인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야반도주한 지 한 달 뒤에 1000달러를 지선의 외화 계좌로 보내왔다. 대학 병원의 연구원이었던 남편이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나름대로 양육비로 상정한 돈 같았다.
지선은 몇 년 전 남편이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했을 때, 합의 이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살짝 후회가 될 때가 있다. 그냥 합의 이혼을 하고 재산을 분할받았으면, 지금보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적을 텐데.
남편은 행방불명되었다. 외환도 새 아내의 지인이 보내주었다. 계좌에 들어오는 1000 달러가 남편과 지선이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다. 지선은 양육비가 언제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슬픔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양육비의 기간을 최대한 길게 잡아도 예진이 19세 성인이 되면 끊어질 것이다. 남편은 냉정했다.
남편이 사라진 뒤, 지선은 망부석이 된 것 같았다. 제주 공항에서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남편에게 버려졌던 순간이 기억나자 모멸감 때문에 지선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전혀 아물지 않고,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자란다는 것을 지선은 깨달았다.
*
지선은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들어서며 테디 베어 인형들을 보았다. 며칠 전 집에 늦게 왔을 때, 예진이 울고불고하며 저 인형들을 버리겠다고 했다.
"엄마, 오늘 저녁 차릴 때, 이 인형들을 보는데 갑자기 화가 났어요. 이제 아버지를 영원히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선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예진이 차마 인형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웬 말 같지도 않은 말이야. 너는 사 차원에 살고 있니? 네 남편은 동정의 가치가 없는 진짜 나쁜 놈이야. 입양아라고 불쌍하다고? 제발 잊고 욕해."
지선은 친구 경민이 자주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제 예진이 자라 친구와 같은 말들을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지선은 며칠 동안 고민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었다.
지선은 피아노 위의 인형들을 종이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20리터 종량제 봉투에 종이봉투를 담은 후, 집 안의 다른 쓰레기통에 있던 쓰레기로 마저 채웠다. 종량제 봉투의 윗부분을 묶었다. 현관문 앞에 봉투를 세워 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지선은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 물에 지선의 눈물들도 보이지 않게 쓸려 내려갔다.
'남편이 아이에게 사준 추억을 버리고 싶지 않았어..... 우리 가족이 새로 시작하는 걸로 착각했었지..... 어쨌든, 여행은 행복했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의 짐이 하나도 없었어..... 이젠 끝이야.'
지선은 자신이 왜 인형들을 못 버렸는지 기억이 났지만, 부질없었다.
*
다음 날 아침, 예진은 화장실을 가다 테디베어 인형들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 지선은 부엌에서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엄마, 웨딩 인형들 어디 갔어요?"
"숨었어. 아빠처럼. 꼭꼭 숨었어."
"아버지처럼? 그럼 눈에 안 띄게 꼭꼭 숨으라고 해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달려가서 패버릴 거예요. 가만히 안 둬."
예진은 공중에 두 주먹을 쥔 팔로 샌드백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성에 안 찼는지 오른쪽 다리를 번쩍 들어 차는 동작을 했다.
"그래. 참, 엄마는 오늘 오전 11시에 나가. 일찍 학교 가는 네가 현관 앞 쓰레기봉투 버려."
"네."
예진은 모처럼 밝은 목소리로 순순히 대답했다.
"와, 우리 예진이 오늘따라 기분 좋네. 이제 곧 어린이날인데 센터 할아버지가 선물 준대."
"엄마, 장난해요?
어린이날 왠 산타?"
예진은 이상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선을 바라보았다.
"너도 어린이가 아니잖아. 내가 유기견 센터에 전화해 놨어."
지선은 예진의 손을 꼭 잡았다.
예진의 얼굴이 스위치를 켠 듯 밝아졌다.
"가서 마음에 드는 동생 데려 오자."
예진은 기쁜 마음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 엄마와 아침을 먹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모녀는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