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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Mar 01. 2024

미국에 살아도 영어공부 하기 싫어

학원없이 토플 단기 독학


이걸 반드시 잘 해야만 해! 라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20대 초반까지 이 마음에 쫓기며 살았다. 잘 해서 점수를 잘 받는 것.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의 '잘 하는 것'은 '점수를 잘 받는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다들 열심히 하는데? 다들 점수를 잘 받으면? 그러면 어떡해?


한국에서 상대평가의 회오리 속에 살면서, 무엇이든 점수를 잘 받아야 했고, 그 잘 받은 점수 조차 남들의 점수보다 나은 것이어야만 했다. 초, 중, 고, 대학교까지 나를 대표하는 점수를 잘 받기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미국에 와서 스텐포드 교육원 자서전 쓰기 수업에서 D+ 를 받은 후에야 나는 마음이 후련해 졌고, 내가 점수 받는 것에는 넌덜머리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다시 점수를 위한 시험을 공부하려니 공부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강박감과 그 안에 커트라인을 넘는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토플 시험을 봐 보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일정 정도를 떠나서는 평소에 영어를 잘 하는 것과는 상당한 괴리감이있는 시험이다. 읽기와 듣기는 수능이나 토익과 비슷해서 익숙하지만 읽기나 말하기는 해당 주제나 과제를 받고 그 주제가 어떤 종류인지에 따라 초 단위로 할 말을 준비해서 대답해야하는 매우 기계적인 스킬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학원을 다니는 게 그 이유다. 학원에서 어떤 식의 질문에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하는지 형식과 틀을 다 만들어서 가지고 있고, 그대로 달달 훈련해서 말하기와 쓰기를 하는게 훨씬 효과적이다.


이건 해당 언어를 잘 하고 안하고와는 별개의 기능이다. 영어권 현지인이 수능을 풀 때 한 문제에 1분 이내 푸는 걸 굉장히 어려워 하듯이. 한국어 현지인인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누가 "너는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해? 그 장르는 왜 좋아하고 가장 좋았던 영화를 추천해봐. 이유도 알려줘" 라고 물으면, 우리는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떤 장르를 좋아하지? 그 장르에 뭐가 제일 좋았더라? 이거? 저거? 잠깐, 애초에 내가 영화를 좋아하나? 나는 영화보다는 뮤지컬을 좋아하는데. 영화 최근에 본 게 없는데 뭐라고하지"


어떤 질문에는 개인의 기호나 감정적인 연관이 있길 마련이고, 상황에 따라서 내가 어떤 대답을 할 지 시간을 들여 선택할 뿐이다. 토플은 이런걸 다 개나 줘버린다. 이걸 몇 초 안에 생각해서 바로 와르르 쏟아내야한다. 질문에 대한 나의 의견은 아무 관련도, 필요도 없다. 질문이 원하는 대답만, 영화 장르, 좋아하는 이유,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영화를 당최 안 봐서 그 상황에 아무런 영화가 생각이 안 난다면 얘기할 거리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릴 것이고 그럼 그 문항은 망했다고 보면된다.



게다가 이놈의 시험은 한 두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 짜리다. 정기 시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으며, 한 번 볼 때 마다 200불 (26만원 정도)를 지불해야하는 부담 덩어리였단 말이다. 10월 전에는 결과를 받아야하니, 8월-9월에 시험을 본다고 했을 때 잘 해봐야 2-3번의 기회가 있었다.





미국에 온 지 2년차, 한국에 살 때도 안 했던 토플공부라니.


하기 싫은 마음과 몸을 이끌고 퇴근 후에 전에 사 뒀던 책을 붙들고 공부를 했다. 근무하다가 틈틈히 시간이 나면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기 싫었다.


  왜 수업을 들을 생각은 안해봤냐고 물으면, 내가 지원하고자 하는 학교의 과는 경력을 더 많이 보기 때문에 토플 컷이 높지 않아 (80정도 였던 듯) 시간 내에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이 전에 있길래 쓸모 있을까 하고 그냥 수강했던 토플 수업이 내 입장에선 굉장이 헐레벌레 했다. 강사는 러시아분 이셨는데, 딸내미 얘기, 과거에 가르쳤던 수강생 이야기를 자주 늘어놓으셨고 대강의 포인트를 집어주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구글링을 해봐도 나오는 얘기였다. 한국의 집요하고 어마어마한 학원포인트는 없었다. 그렇게 콕 찝어주는 걸 들으려면 여기는 학원보다는 튜터링(과외)인 듯 했는데, 가격 차이도 크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해야하니 문제를 풀었다. 모의고사를 풀고 또 풀고 계속 풀었다. 처음에는 유형에 익숙해 지는 것과 시간 내에 다 푸는 것에 중점을 뒀다. 유형과 시간에 익숙해지자, 대충 각 항목에서 몇 점 정도씩 나오는지가 눈에 보였다. 듣기와 읽기가 더 익숙하니 이 두 항목에서 되도록이면 괜찮은 점수를 받아야했다. 말하기와 쓰기는 그냥 혼자 시간에 맞춰서 답하는 걸 훈련했다. 첨삭을 받을 데가 없으니 그냥 혼자서 했다.



점차 익숙해지고나서는 어디서 모의고사 하나를 싼 값에 구매해서 혼자서 모의시험을 봤다. 사람이 첨삭해 주는 채점이 아니라서 말하기와 쓰기에는 거의 후진 첨삭이 왔다. 어쨌는 합격 컷이 넘는 점수가 나와서, 에잇, 그러면 속는 셈 치고 시험에 등록했다.



때는 8월. 집 근처에는 시험장이 없어서 산호세까지 차를 타고 주말에 내려갔다. 시험을 보러 들어갔더니 세상에, 여권을 가져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꽤 보안(?)이 삼엄해서, 휴대폰도 꺼야했던가 그랬다. 나는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집에 있는 호팸에게 연락을 했다. 급박한 상황을 듣더니 호파가 여권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어휴 다시 직원에서 달려가서 직원에게 누가 여권을 가져다준다고 하니, 시험 시작 후는 새로운 사람이 아무도 못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아이고야. 나는 호파에게 그럼 여권을 주차된 차 어딘가에 낑겨서 숨겨달라고했다. 누가 훔쳐가면 어쩌냐고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을 졸이며 읽기와 듣기 시험을 봤다. 여권 때문에 긴장이 되어서 땀이 뻘뻘 났다. 여권 없다고 시험 못 보게 하면 어떡하지? 시간도 버리고 200불도 버리는 건데.


나는 직원에게 양해를 얻어 휴식시간에 주차장으로 뛰어나왔고, 다행히 여권은 찌부찌부 된 채로 차에 낑겨져 그대로 있었다. 아직도 그 주차장이 기억난다. 쨍쨍한 산호세 햇볓에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주차장. 뜨거운 자동차. 조금 구겨진 여권 (손상되지는 않았다).






시험을 보고나서 결과를 기다리는 건 어려웠다. 기다리는 동안에 계속 토플 공부를 해야할 지 말 지가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당장 집어던지고 싶은데, 점수가 안 나왔을지도 모르니 마냥 놀기에도 불안했다. 빨리빨리 좀 보내줄 것이지.



얼마 후 결과가 나왔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90점대였다. 역시나 듣기와 읽기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았고, 말하기와 쓰기는 그냥 중간 점수 정도를 받았다. 오예, 시도 첫 번에 필요한 점수를 받았다. 문제푸는 스킬을 더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뻤고, 시험을 계속 보겠다고 200불과 시간을 태워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또 기뻤다. 받은 점수 증명을 무사히 다른 서류들과 함께 대학원에 냈다.


호팸과 저녁을 먹으면서, 한 방에 원하는 점수가 나왔다고 했더니 축하를 해줬다.


"그래서 몇 점 나왔어?"


"90점대 나왔어" 그랬더니, 호파가


"아, 100점 만점 인가보네" 했다.


"아니, 120점 만점이야" 했더니


"에이 뭐야, 얼마 못 받았네" 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사람이! 나는 억울해서


"이게 얼마나 자잘하게 기술이 필요한 시험인 줄 알아? 너 지금 시험봐도 90점 안 나올걸" 하고 우겼고, 그는


"나는 원래 영어 못하니까 점수 안 나올걸 (미국인임)ㅋㅋㅋ" 해서 할 말이 없었다ㅋㅋ.



토플 시험 공부가 영어가 느는데 도움이 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계속 보고, 듣고, 쓰고, 말하는 전반적인 언어를 연습하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짧은 토플공부를 하면서 영어가 늘었냐고 하면 잘 모르겠다. 영어자체를 잘 하기위해 '배운다'기 보다는 '기계적 기술'를 연마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나는 그 이후로 비슷한 영어시험을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었다.


토플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시면 학원을 다니시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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