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residio Library Mar 22. 2024

미국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요?

영어로 하는 것 말이에요

언어를 배우고자 하면 흔히 연애를 하라고들 한다. 연애를 하면 진짜 빨리 영어가 는다고. 나를 사랑해주고 세상 세심하게 가르쳐줄 최상의 개인 과외가 아니냐고들. 논문을 쓰는 것도, 직장을 구하는 것도 다 도와줄 수 있지 않느냐고.


음, 저것은 모두 별개의 질문이다.


1. 남편이 영어를 잘 가르쳐줘서 빨리 늘지 않나요?

첫 번째의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어렵다. 질문을 반으로 나눠야 한다.

 1-1) 남편이 영어를 잘 가르쳐 줘서 -> X

 1-2) 영어가 빨리 늘지 않나요? -> O


엉? 무슨 말이지? 싶으신 분은 저 문장은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사실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보통, 제 2 외국어로 자신의 모국어를 하는 이를 만나면, 우리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고 하는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단어를 모르는 것 같으면 풀어서 설명하거나 쉬운 단어로 대체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신제품 시음회를 가려면 어느 경로로 가는 게 효율적인지 알 수 있을까요?" 라는 말인데 상대가 외국인이면,

"새로운 상품을 맛보는 행사가 있는데, 거길 어떻게 가는 게 가장 쉬울까요? 정도로 쉽게 말하곤 한다.


아,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말을 굉장히 흐르는 듯 빠르게 하는 편이며, 축약어나 속어도 마구 섞어서 우르르 쏟아내는 사람. 초반에 만날 때는 뭐라고 하는 지 절반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미국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해 봤는데,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못 하는 건 또 아닌데, 캘리포니아 특유의 억양이라고 할까, 그런게 있었다.


나는 이걸 기뻐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헷갈렸다. 이 사람 입장에서는 외국인이라고 천천히 아기처럼 대하며 말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외국인 취급 안 해줘서 좋았는 동시에, 내가 알아듣는 지 마는 지는 상관이 없는가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잘 모르는 사이에 따지고 멱살을 잡을 수 없으니, 나는 그냥 대충 못 알아듣는 것은 흘리고 알아듣는 것에 집중하며 대화를 했다. 못 알아 듣는 건 내가 나중에 검색을 해 볼 지언정 굳이 자존심이 상해서 물어보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하면서, 나는 그제야 이게 단지 이 사람이 말 하는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를 무시하고 못알아들으라고 빨리 말하거나 약어와 속어를 섞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아마 몇 년이 지나면서 의도치 않게 나는 이 방식에 익숙해 진 모양이었는데, 재미있게도 그게 아마 빠른 듣기 파일을 돌려돌려 듣고 말하는 효과가 있었는 모양이다. 현지인 같은 억양과 표현, 제스쳐는 아마 여기서 습득한 결과일 것이다. 그 이후에는 나도 익숙해져서 조금은 잊고 살았다.


작년인가, 한국에 가서 형부를 만나 남편을 소개시켜줬다. 한참 얘기를 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언니한케 카톡이 왔다.


  "형부가 아까 [남편이름]이/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래. 너무 빨라서. 너 어떻게 다 알아듣고 대화하냐고 영어 엄청 잘한대"

(참고; 우리 가족은 나의 외국인 남편이 편하게 이름을 부른다. 남편도 엄마아빠를 빼고는 우리언니와 형부도 그냥 이름을 쓰고. - 울언니 까임방지협회)


그렇다. 잊고 있었다. 남편이 하는 말은 한국인이 익숙한 영어듣기평가와는 비할 데가 못 된다는 것을. 나는 황급히 그건 형부 탓이 아니고 내 남편이 말을 알아듣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라고 형부를 감쌌다. 그게 진짜니까.


8년 즈음 지난 지금은 대놓고 못 알아듣겠다고 뭐라고 한다. 종종 남편은 단어를 섞어서 말하거나,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에 꽂혀서 나에게 아무 문맥도 제공하지 않고 그냥 말하기 때문에 얘가 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듣고 눈치로 맞춰야한다.


예를 들어, 조쉬가 어딜 가서 뭘 했다, 어쨌다 이런 말을 마구 하는데 막상 그 조쉬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무 배경지식도 주지 않은 상태라거나, 조쉬얘기를 한참 했는데 이상해서 다시 물어보면 동명 이인의 또 다른 조쉬였다거나, 그런 식이다. 그럼 나는 "How do I supposed to know which Josh this one is if you don't tell me who he is?" (니가 누군지 말을 안 해 줬는데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이게 어떤 조쉬인지 알아야함?) 하고 승질을 낸다.


다시 돌아가서

 1-1) 남편이 영어를 잘 가르쳐 줘서 -> X

부분을 살펴보자.


남편은 '영어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남편은 언어에 소질이 없는 전형적인 이과남. 대화중에 약어나 속어를 사용해서 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대답하거나 모른다고 한다. 내가 스펠링이 헷갈려서 물어보면 본인도 헷갈려한다.


예를 들어, proud (자랑스런)의 뜻을 물어본다고 치면, "That's like when someone is proud of something" (그거 왜, 누가 뭐가 자랑스러울 때 그럴 때) 이런 식으로 전혀 영양가가 없는 대답을 하는 식이다ㅋㅋㅋ 자랑스러운을 설명하려면, "무언가에 뿌듯함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이 다른 비슷한/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써야하는데, 물어본 단어를 고대로 또 써서 대답한다. 물어보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된다.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영어에서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아야 하는 전치사나 정관사 정도다. 도대체 a, at, the같은 놈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익숙해 지질 않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대/데 헷갈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굳이 문법을 따지지 않아도 대/데가 헷갈리지 않고 읽어보면 바로 고를 수 있는 것 처럼, 남편도 "여기는 the 붙여야돼" 하고 말해준다. 다만 왜냐고 물어볼 순 없다. 대답이 "I dont know, that’s just how it is” (나도 모르는데 그냥 그래야 함) 이기 때문에.ㅋㅋ



2. 남편이 영어로 하는 거 잘 도와주지 않나요?

아니요


앗, 대답이 너무 빨랐다.


하지만 사실인 걸. 대학원 지원도, 논문도, 취업도, 일도 다 나 혼자서 했다. 인적 관계와 추천이 중요한 미국에서, 남들은 남편의 일가친척이나, 친구나 해서 꽂아줘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나는 그런 걸 부탁해 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다. 도와달라고 잘 부탁해 본 적도 없지만, 사실 잘 도와주지도 않는다. 아마 본인이 뭘 잘못해서 해가 갈 것을 걱정하거나,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게다가 남편은 가끔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까먹는 것 처럼 보인다. 자기 어렸을 때 봤던 만화나 티비 프로그램 같은 걸 얘기하면서 나한테 기억나냐고 묻거나, 대학생 때 일어난 일을 묻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그 때 한국에 있었는데? ㅋㅋㅋ 여기 안 살았다고" 하면 그 때 " 아 맞다" 하곤 했다.


최근에는 근데 그게 갑자기 조금 억울했다. 한국은 영어가 잘 되어있어서 그가 갈 때 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병원을 가야한다거나, 코로나 때 필수 검사를 받아야 한다거나, 영어가 안 통하는 곳에서 한국어로 사람과 소통하며 해결해야 한다거나 하는 때에 나는 발벗고 나서서 남편을 도왔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남편이 나를 능동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니까, 그게 무시하는 것 처럼 느껴져서 억울해졌고 좀 뭐라고 했다. 나는 너네 나라에서, 너네 나라 말로 일하고, 먹고, 자고 하다못해 싸울 때도 너네나라 말로 싸워주는데, 내가 너한테 뭘 해달라 그런 적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관심을 보이고 도와주려는 성의는 보일 수 있지 않느냐고 싸웠다. 남편은 나쁜 의도가 없었으니 당황해하며 미안하다고, 알아서 잘 해서 자기가 도움은 될 지 모르겠지만 노력해 보겠다며 사과를 했다. 그 이후로는 내가 뭐든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주려는 '척'이라도 한다.





내 남편이 살갑게 천천히 말하며 영어를 도와주는 스타일이었으면 나는 영어를 지금보다 더 잘했을까? 아니면 남편이 외국인인 나를 배려하지 않고 빨리감기 감은 것 마냥 후두둑 말하고 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어서 잘하게 된 걸까?


답은 없다. 어쨌든 얘는 내 남편이고, 나는 영어를 못하지 않으니, 결과물은 나쁘지 않은 이상한 상황. 다만 나는 왜 손해보는 느낌이 없어지지 않는 지는 잘 모르겠다 ㅋㅋㅋㅋㅋ








이 글은 브런치 메인에 소개되었습니다




이전 04화 미국 대학원에서 과제를 C 받으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