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residio Library Mar 15. 2024

미국 대학원에서 과제를 C 받으려면

네 거 뭐라 그러는 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불편한 점이 없다. 옛날에는 전화통화하면 뭐라고 하는 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내재된 두려움이 있다. 글을 쓸 때. 이게 맞나, 문법을 체크하고 또 체크한다. 사실 이유가 있는 두려움이다.



대학원을 다닐 때 한국인 교수님이 계셨다. 한국인을 찾아다니지 않던 나는 반가웠다. 한국에서 대학원 다닐 때 교수님을 너무너무 존경했고 지금까지도 감사히 연락을 드리며 지내기에, 당연히 그 교수님과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반에는 수업 끝나고 조금 남아서 교수님 조언도 받고, 내 처한 상황에 대해 여쭤보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그랬다. 딱히 나를 아껴주신다거나 하는 느낌은 못 받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영어로 쓰는 대학원 수준의 과제에 나의 영문 글쓰기가 성치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둘째 학기인가, 과제 하나에 C+을 받았다. 대학원에서, 과제를 안 낸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해서 냈는데 C+를 받는 건 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저명한 교수님 지도아래, 경력 많고 능력있으신 원장님/원감님과 선생님들이 일하고계식 좋은 원에서 일했던 것을 전제로 써 갔던 과제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영어를 못 썼나? 내가 뭘 잘못 썼나?


얼마 후 수업에 개인 과제에 주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 때 오페어 아이들네 집에서 살고 있었고, 꽤 종종 한국에서 가르치던 아이들을 맡고있는 내 전 파트너선생님 겸 친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영상통화를 하면서 연락하고 지냈다. 그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영어 수업을 받고 있는데, 오페어 아이들이 영어를 하는 것을 보고 큰 관심을 보였었고, 오페어 아이들도 그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영상통화로 말을 걸며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 상황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정기적으로 함께 프로젝트를 해서 영상통화로 이야기 나누기, 커리큘럼 공유하기, 주말 이야기/우리동네 소개 등을 하면서 친교를 다지는 걸 해봤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티나게 더 얘기를 해봐야 한다 하고 다음 학생으로 턴을 남겼고, 나는 수업이 끝나고 남아서 교수님에게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다. 다른 수업에서도 여기 어린이집에서 중동에 있는 어린이집 교사와 함께 연구를 한 긍정적인 케이스를 다른 수업에서 다룬 터라, 한국에도 경험이 있고 미국에도 경험이 있는 나의 자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은 다시 한 번 왜 그런 주제를 하고 싶어하느냐고 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아이들도 재미있어하고, 나도, 한국의 선생님에게도 새로운 도전과 콜라보가 될 수 있으니 커리큘럼이나 발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싶다, 뭐 그렇게 최대한 잘 얘기했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교수님이 코웃음을 치시면서,

"아니, 어린 유아에게는 손에 닿고 실질적인 것에서 세상을 탐색하고 조사해 나가는 것이 발달적으로 적합한데, 너는 무슨 말도 안되게 다른 나라의 아이들과 그 동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프로그램을 하는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고 의미가 있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했다. 다른 수업에서 본 그 연구를 언급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럼 어떤 걸 하면 좋을까요, 하고 물었었나.

이후 계속 말로 얻어맞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니가 지금, 너 과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아마 최근 C받은 그 과제를 말하는 듯 했다). 너 학교를 제대로 다니려면 지금 그 오페어 집에 잘 하는 것도 둘째치고, 남자친구도 만나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지금 이거만 해도 될까 말까야"


다른 수업에서는 아무도 과제의 퀄러티가 특히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없던 터라 나는 너무 놀랐다. 내 과제가 그렇게 형편없었단 말이야?


그 밖에도 한국에서 오래된 옛날방식으로 교육하는 걸 배워와갖고, 그런 거 말고 여기서 지금 너 수업에 있는 선생 하는 00이나 aa한테 다배워야지 이런 얘기까지.(대학원 동기들. 같은 곳에서 일하고 같은수업을 들었다. 경력이 비슷했고 서로 배우고 뭐고 할 게 없이 고만고만했는데. "쟤한테 가서 배워" 라니.)




 

저 모든 이야기가 저 날의 저녁에만 나온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어찌됐든 저 날 밤에 나는 계속 말로 얻어맞으면서 이 사람은 나를 울리려고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과제 아이디어가 그래, 일반적인 유아 프로그램 아이디어는 아니고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었다고 이해했다. 그럴 수 있다. 그래. 과제도 내가 영어를 못 썼겠지. 단어가 적확하지 않아서 돌려돌려 써서 장황했겠지. 내가 프로그램 설명을 잘 못했겠지, 하더라도, 그래도 말이 안 됐다. 더 영어를 못하는 유학생들이 수두룩 했고, 나는 그들이 그런 낮은 점수를 받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저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었다. 나 자체를 허영에 찌든, 한국에서 어디 개차반 같은데서 일하다 와 놓고는 헛소리 한다고 생각했을지라도, 개인의 사생활까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다니던 고퀄리티의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도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서, 나의 모든 것을 깎아내리는 것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언행이었다. 나를 기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내 오페어 가족은 나를 가족처럼 소중히 여겨주고 내가 교육자로서 굉장한 가치가 있다며 대학원 학비도 내주고 방도, 차도 내주었다. 그런 가족과 같은 사람들을 내버려두라고? 내 사생활 연애까지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무슨 권위로 나한테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건가??


아무 것도 없이 혈혈 단신으로 와서 그저 외국 대학원이라고 아무것도 모르고 다니는 허영찬 유학생으로 보고 땅바닥으로 휘내리쳐 구두굽으로 잘근잘근 으깨버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서 와서 아무 것도 모르니 굽히고 들어와 싹싹 빌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모욕적이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참고 가까스레 잘 인사를 하고 나왔다. 건물을 빠져나와 집에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걸었다. 몸이 마구 떨렸다. 귀가 멍하고 앞이 안 보였다. 세상에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그런 무시는 처음 당해봤다.


캄캄한 밤에,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건너며 지금의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면서, 꺼이꺼이 엉엉 울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쳐다보든가 말든가 내가 그렇게 멍청하고 무슨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을 만큼,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과제만 해야 할 만큼 무능력하냐고 쏟아냈다. 몸이 떨려서 차에 타서도 계속 울기만 하고 운전을 못 했다. 내가 능력없고, 쓸모없는 사람 같았다.






저 교수님은 아마, 충격요법 비슷 한 것으로, 더 잘하라는 의미로 했던 말이라고, 그런 의도로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깎아내리는, 그리고 한국에서의 내 직장과 교수님과 동료들이 열심히 일하는 프로그램을 깎아내리는 말은 하면 안 됐다. 본인도 교육자인 입장에서, 분수를 알게 하고 싶으셨더라도 희망을 주면서 과업을 계속 하도록 하셨어야지, 사정없이 내리쳐서 자존감을 바닥으로 산산히 부수고 다 포기하고 싶어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저 때의 기억은 정말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서, 이 글을 쓰면서도 손과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난다. 머리가 아프다. 당장에라도 때려치고 싶었다. 정말 다시는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나는 버티는 쪽을 택했다. 저 이후로 다시는 저 교수님께 따로 찾아가지 않았다. 다시는 한국어를 쓰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조언을 묻지 않았고,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 계속 과제를 하고, 공부를 했다. 연애도 그만두지 않았고 오페어가족과도 잘 지냈다. 교사로서 일도 했다. 필수 수업을 제외하면 사실 저 교수님의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었으나, 피하지 않고 들었다. 피하는 것으로 보이기 싫었다.



교수님의 말에 따라 공부한답시고 나를 고립시키지 않았다. 대학원은 내 삶의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누굴 만나든 그 사람이 조종할 권리도, 나쁘게 말할 권리도 없다.


시간이 지나고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원장님께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했다. 약혼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 교수님 수업에서의 과제 점수는 점점 올라갔다. B였다가, A가 되었다. 어느 날인가, 마주쳐서 수업시간에 간단히 말을 나누는데, "그 어린이집 원장님이 일 잘한다고 칭찬을 하더라. 역시 일하던 경력자가 와서 다르다"라고 영어로 웃으며 칭찬을 했다. 나는 쓴 웃음이 났다. 참나, 몇 달 만에. 역시라니?



본인은 몰랐을 것이다. 본인의 말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오랫동안 나를 찔러댔는지.


다니는 동안 나는 수업 가는 게 무서웠다. 저 교수님과 마주치기 싫어서 울었고, 과제를 쓰면 말도 안되는 소리일까봐 두려워서 쓸 수가 없었다. 논문철 즈음 되서는 그게 너무 심해서, 처음 초본을 들고 가는 날에는 덜덜 떨면서 갔다. 당시 지도교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또 도망가는 것 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그 교수님을 선택했다. 컨셉을 설명했더니 내 말을 끊고 "그래서 데이터가 어딨는데?" 하고 다른 동료들 앞에서 면박을 당했다.


재밌는 건, 초본을 읽어보시더니 이거 괜찮은 생각이라고 칭찬을 하셨다. 씁쓸했다. 읽어나 보시고 까시지. 이런 형식은 B 교수님 전문이시니 그쪽으로 지도를 받으라고 해주셨다. 사실, 정말 다행이었다. B 교수님은 온화하기로 유명한 분이셨다 (채점을 온화하게 하진 않으시지만). 내가 너무 긴장하고 무서워하는 걸 이해해주시며, 분명히 말도 안되는 글을 잔뜩 써갔을 텐데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일단 쓰라며 토닥여주셨다.


 정말 힘들 때 그만두고 싶다고 매일 되뇌었다. 남편에게 "나 이거 그만 둘 수 도 있어" 하고 수십번을 말했다. 그 때마다 남편은 정 힘들면 그만 둬도 된다고 했다. 근데 너는 잘 하고 있다고, 외국에 와서 제 2 외국어로 논문을 쓰는데 세상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고 대단하다고 말해줬다. 논문 초본을 들고 덜덜떨면서 갔다가 돌아온 날에는, 남편이 나를 위해 사 온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타르트가 귀여운 노란 그릇에 담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늦게 수업에서 돌아왔는데 날 기다리고 있던 아늑한 조명, 귀엽고 노란 르크루세에 담긴 치즈 타르트와 차 한 잔

그래서 괜찮을 수 있었다. 나는 잘 하고 있고,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이걸 그만 두더라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느 상황에서라도 그대로 내 곁에 있어줄 테니.




나는 무사히 칼졸업을 했다. 다른 교수님들 수업을 포함해서, 내가 C+를 받은 과제는 저것 뿐이었다.



나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존버는 승리 비슷한 걸 한 셈이다. 다만 저 때의 기억은 지겹게도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영어로 뭘 쓸 때마다 조금은 두렵다.



혹시나 비슷한 두려움으로 다 포기할까, 혹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존버가 어려우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시라. 그리고 우리에겐 챗 GPT가 있다. 논문을 위해서라면 Grammerly도 있으니.



                    

이전 03화 너 외국인 엑센트가 아예 없는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