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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Mar 29. 2024

참, 나 영어로 일하고 있었지

In the zone




대학원을 졸업 후 취업을 했다.



사실 대학원 졸업후에 다른 직종도 알아볼까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운 좋게 어느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면접을 봤었다. 전혀 발을 담가 본 적도 없는 분야. 면접을 보는데 나는 이런 사람이다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과제를 주는데 뭘 어쩌란 건지도 잘 모르겠고 해서 어버버하다 나왔다. 당연히 결과는 불합격.


그러고나서는 전공분야에 원서를 넣었다. 이번에는 연락이 잘 왔고, 전화면접을 가볍게 넘긴 후에 2차 면접을 보러 직접 갔다. 내가 긴장해서 떨고 있으니, 원장님은 물을 한 컵 주며 잘 할 거라고 떨지 말라고 했다.


막상 면접을 시작하고 나니 정말로 말이 잘 나왔다. 전공 얘기를 하다보니 경험도, 지식도 많았고 전공용어들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할말이 참 많았다. 전공은 전공이구나, 대학원도, 이 전 직장도 그냥 다닌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을 잘 마치고 며칠 내에 연락을 준다고 했다.



나와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누구누구 라고 이름을 소개했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방금 면접 본 원장님이었다.

"아까 며칠 걸릴 거라고 한 건 아는데, 너를 놓치기 싫어서 바로 전화해서 알려주고 싶었어! 우리와 같이 일했으면 정말 좋겠어!"



그렇게 취직을 했다.







일반교사가 아닌 중간 관리직으로 들어갔다. 관리해야하는 교직원만 언제나 30명 내외였고 매일 드나드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까지 합하면 몇 백 명은 되었다. 처음에는 리더십 규모가 너무 커져서 낯설었다. 막 일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직 만으로 서른도 되기 전이었는데, 담당하는 교사들은 20대 부터 60대 까지 다양한 나이대였다. 교사들도 나도 서로를 잘 몰랐고, 원은 너무 바빴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덮쳤다.


세상이 문을 닫았고, 우리 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다시 오픈하면서 나는 원감으로 승진을 하고 코로나 대책을 맡았다. 그야말로 대 혼란의 시대. 부모들은 일을 해야했고, 어린이집은 간절했는데 모두가 원하는 '안전규칙'의 정도는 달랐다. 건강 관련 법규와 규칙은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었다. 규칙이 엄하면 엄하다고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싫어했고, 규칙이 완화되면 또 반대쪽에서 왜 규칙이 느슨하게 바뀌었냐고 싫어했다. 나는 동분서주 바쁘게 뛰었다. 이 쪽에서 화난 사람을 진정시키고, 저 쪽에 가서 잘 하는 사람을 칭찬했다가, 다시 대각선으로 달려가서 로컬 법령을 상대했다. 크리스마스날 밤에 비상으로 출근을 하기도 했다.


힘들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우리 원에 회사가 세워놓은 감시탑 달린 장벽이었다. 내가 감시를 놓으면, 어린이들은 물론 그 가족과 교사의 건강과 안전이 뚫릴 수도 있었다. 거침없는 풍랑과 벼락 속에서 때로는 원장에게 하소연도 하며 (집에 와서 ㅅㅂㅅㅂ도 하면서) 그 장벽을 지켰다. 내가 맡은일은 적어도 다 해냈다. 주변의 원들이 하나 둘 씩 문을 닫았지만 우리는 버텨냈다. 아마 그 때 였을 것이다. 더 이상 원감이라는 역할이 낯설지 않아졌고, 교사들을 상대하기도 편안해 졌을 때가.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았는데, 일하면서는 '영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잊고있었다.


그냥 이거 주문하고 얼마에요 수준의 초급회화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대형 어린이집에서 원장이 없을 시에는 원장 대행으로 일하는 위치였다. 이메일을 그렇게나 주고받고, 서류를 쓰고, 회사 내규/관련 법령 문서를 읽고, 교사의 문서를 리뷰하고 첨삭했다. 새로운 학부모 투어를 하고, 상담을 하고, 새 직원 채용 면접을 봤다. 심지어는 하루가 멀다하고 코로나 때문에 컴플레인이 있는 학부모/교사를 상대로 대면, 혹은 전화로 싸웠(?)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대상으로 공지사항이나 행정사항 변경을 보내는데도. 물론 오타나 문법적 오류가 있나 살피고 어떻게 하면 말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지는 고민을 했지만, 내가 '영어를 못 할 까봐' 걱정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 번도 누군가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거나, 내 의사소통으로 인한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내가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할 때에는, 무언가에 열중하여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고 몰두할 수 있는 상태에 (영어로는 'In the zone' 이라고 하는) 있다는 뜻이니까. 내가 영어를 따로 뇌 한쪽에서 언제나 고민하고 우물쭈물 하지 않고도 그냥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반대로 내가 한국어를 할 때에는 이상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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