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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Apr 05. 2024

영어 섞어서 쓰면 재수없잖아요

잘난척 하는 것 같잖아요ㅠㅠ

그래,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서는 한국말을 내뱉을 일이 잘 없다. 몇 몇 한국인을 만날 때나 한국의 가족/지인과 통화를 할 때 뿐. 그래도 나는 아직 한국말을 한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나 새로 생긴 것들은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국말을 한다.


문제는 한국말을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과 해야 할 때 발생한다.



첫 번째, 종종 한국어로 업무를 해야 할 일이 있다.


업무 이메일/메세지를 보낼 때가 제일 난감하다. 하도 미국에서 업무용 이메일을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이런 경우에는 영어가 먼저 나온다. 영어 업무 이메일은 대충 이런식이다.

I hope your Monday is going well. Attached is the requested document from our last conversation. Please let me know if you need anything.

(너의 월요일이 잘 가고 있길 바래. 첨부된 문서는 저번에 우리 대화에서 요청 한 거야. 뭐가 필요하면 알려줘)

Best, (끝맺음 인사)



같은 내용을 한국어로, 윗사람에게 쓴다고 해 보자. 어... 뭐라고 인삿말을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오늘도 안녕하시지요? 안녕하세요? 행복한 월요일입니다?

저번에 말씀주셨던 문서를 첨부하였사오니 살펴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걸 어떻게 예의바르게 써야 할 지 모르겠다. 살펴보시고.. 수정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끝인사는 더 문제다. 생각같아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러고 끝내고 싶다ㅋㅋㅋㅋ 이러다보니 짧은 이메일을 보내는데 썼다 지웠다, 30분도 더 걸린다. 영어는 목적을 좀 더 적나라 하게, 간결한 단어로 쓰기가 더 편한데, 한국어에 존대어까지 등장하면 21세기 이메일이 17세기 상감마마한테 쓸 법한 "어서오시옵소서서서" 같은 내용이 되어버리고 만다.


두 번째, 한국에 방문한 첫 주


다행히도 아직 한국에 가면 만나 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이나 이전 직장 상사/동료 분들까지 보통은 가면 매일 매일 스케쥴을 맞춰서 못 만났던 사람들을 몰아서 만나는데, 이러면 첫 주가 문제다. 갑자기 한국말을 많이, 한국사람들과 하려니 종종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생겨버린다. 아니, 정확히 말 하자면, 영어로 단어가 먼저 생각났는데 그걸 한국어로 뭐라고 해야 할 지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어려울 때가 생긴다.


언어는 문화와 함께 하므로, 어느 단어를 다른 언어의 한 단어로 치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면, 영어단어 'silly'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리석은, 바보 같은

우스꽝스러운, 유치한, 철없는

바보(보통 제대로 행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하는 말)      

이렇게 나온다. 한국어로 보면 나쁜 뜻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단어는 나쁜 뜻이 1도 들어있지 않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바보'에서 부정적인 뜻과 느낌을 전부 제거하고 귀여움을 5 아빠숫갈 정도 첨가하면 딱 맞다.


그래서 4살짜리에게 "You silly! That's not your shoe" 는 "그거 니 신발 아니잖아 이 바보 같은 놈아" 가 아니라, "으이구, 우리 귀염둥이! 그건 우리 애기 신발이 아니네요옹(하하호호)" 이다.


그 날도 이런 비슷한 상황. 전 직장동료분들과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이 뭘 어떻게 한다 라고 얘기하면서 "Clumsy"라는 단어의 한국어 직역버전이 생각이 안 났다. '칠칠맞다'는 너무 못됐고, '어설프다'라고 말하기도 뭔가 애매해서 그냥 "남편이 조금 클럼지 (clumsy) 해서" 라고 얘기했다.


나는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서 말하고 싶지 않다. 영어를 하다보니 영어를 한국식 발음으로 하는 것도 이상한데, 그렇다고 한국말을 한국 발음으로 하다가 갑자기 영어 발음으로 영어 단어를 얘기를 하면 그것도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글로 따지자면 "남편이 좀 Clumsy 해서(휴대폰 앱에선 안 보이지만 영어만 다른 글자체입니다)" 처럼 갑자기 난데없이 글자체가 바뀌는 느낌. 그러다보니 모든 영어단어를 한국말로 직역해야한다는 부담감에 휩싸여서, 하다못해 피드백 같이 흔히 쓰는 단어도 가만있어보자, 한국말로 피드백을 뭐라고 하지? 평가? 첨언? 그렇다기 보단 그냥 생각을 얘기해 주는 정돈데? 그럼 코멘트? 그것도 영어잖아!   ------ 이렇게 꼬리를 물게 되는 것이다.


그 날도 이미 여러 번 영어 단어를 섞어서 쓰다가, 지인 분들께 사과를 했다.


"자꾸 영어 섞어서 써서 죄송해요. 딱 맞는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한국말도 잘 못하네요 이제"


"아유, 무슨 말이야! 영어만 쓰다가 왔으니까 영어를 하지!"


"영어 섞어서 쓰면 재수없잖아요ㅠㅠㅠ 잘난 척 하는 것 같고 ㅠㅠㅠ"


"잘난 척을 하려고 일부러 하는 게 아닌 걸 우리가 아는데?!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영어 단어 배우고 좋지. 아까 뭐라고? 클럼지(clumsy)가 무슨 뜻이라고? 나도 써야겠다. 나 좀 '클럼지' 해ㅋㅋㅋㅋ"


지인들은 손사래를 치며 웃고는 과장된 표정으로 영어를 했다. 다들 깔깔깔 웃었다. 내가 민망하지 않게 저렇게 감싸주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차라리 한국어 자체에 영어 억양이 있으면, 저렇게 영어 단어를 섞어 써도 교포려니, 할텐데, 한국어는 또 한국어대로 한국어처럼 하니, 갑자기 영어가 "영어"로 등장할 때 영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언어를 섞어서 쓰는 현상은 사실 여러 언어를 하는 사람들에게 흔한 일인데, 용어로는 'code switching'이라고 한다. 다언어를 하는 아이들에게도 흔히 나타난다.


전통적으로는, 코드스위칭을 미숙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쪽 언어도, 저쪽 언어도 제대로 '못' 한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흔히 다언어를 하는 어린이들이 자주 사용하는데, 학교나 단체에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주언어가 아니라고 혼내고, 집에서는 집에서 사용하는 주 언어가 아니라고 혼내면서 저평가받아왔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아이들이 코드 스위칭을 쓸 때에는 사실 많은 경우 사회정서적인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고 첨언한다. 코드스위칭을 을 하는 아이는 상대가 어떤 언어를 주로 말하는지, 상대가 코드스위칭 두 언어를 다 알아들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상황과 상대에 따라 각각 언어를 바꿔 가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집에서 스페인어만 하는 할머니에게는 스페인어를 쓰지만, 영어/스페인어를 다 할줄 아는 친구에게는 코드스위칭을 쓴다. 친구는 다 알아들을테니까. 이는 영유아 (어른에게도)에게 굉장히 어려운, 고도의 두 가지 사회정서 스킬 - 1. 저 사람의 입장/시야/차이가 나외 다름을 이해하는 것과 2.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에 맞춰내 행동과 말을 조절하는 능력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셈이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김건모 <핑계>, 1993





그렇다.

나는 핑계를 대고 있다.


코드스위칭은 지극히 정상이고, 나는 한국어를 못 하는게 아니라고 ㅠㅠ 나 한국말 잘 한다는 소리 듣는다고ㅠ.



진짜다, 난 한국사람인데 사람들이 "어머 한국말 잘 하시네요" 란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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