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은출간 계약을 맺고 한 달 뒤인 작년 5월부터올해 2월 말까지 대략 10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매일 원고를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니다. 만약 그랬으면 아마 <어쩌다 편의점>은 나의 쌍코피가 낭자한 유작이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출판사의 출간 계획에 따라 번호표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고 새치기만 없길 아니, 새치기해도 좋으니 제발 계약 취소만은 없길 바라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집자님과 간간히 메일을 주고받으며-서로의 생사를 확인했고-조금씩 책의 콘셉트부터 잡아갔다. 나의 글들은 어떤 책이 되고자 하는가, (의인화하자면) 어떤 캐릭터가 되고자 하는가, 어떤 내용과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가를 명확히 설정해야 했다. 교정이란 원고의 알맹이만 빼놓고 아예 모든 게 처음부터 시작되는 빌드업이었다.
서점에서는감성과 힐링 에세이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다. '많이 힘들죠?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예요.' 이런 유의 메시지들. 그런데 세속에 찌든 40대 T가 볼 땐 '오늘 팀장님한테 개갈굼을 당했는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지? 올인한 주식이 새꼬시가 됐는데 어떻게 잘 된다는거야?'라며 입술을 푸르르~ 투레질하게끔 하는 소리였다. 물론, 그들은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훌륭한 책들이고 그래서 인기가 굉장히 많고 그렇게 10만 부 에디션으로 잘 팔리면 장땡이지만 나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위로도 여러 종류가 있잖나. 잔잔한 위로, 무거운 위로, 토닥이는 위로, 감싸주는 위로.. 그중에서 나는 '밝은 위로'를 전하고자 했다. 안 그래도 팍팍하고 고달픈 인생 기 빨리는 얘기 잠시 접어두고 편의점이란 친근한 소재로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그런 맥락에서 책 제목(가제, 최종 제목은 거의 마지막에 확정했음)을 우선 정하고 전체 글들을 분류해 짜임새 있게 묶어 목차를 구성하고 그다음 소제목들을 차례차례 다듬어 가기로 했다. 음.. 그렇담 어떤 제목이 독자들에게 섹시하게 보일까? 사실, 내가 처음 출판사에 투고한 원고의 제목은 ‘여기, 나와 당신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붙인 이유는 편의점과 관련된 책이지만 편의점 책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의점 책이라고 제목에 대놓고 ‘편의점’이라는 단어를 넣는 건 넘 아마추어 같을 거란 쌩아마추어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비록 편의점을 소재로 하지만 내가 진짜 책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를 배경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이었으므로.
며칠을 고민한 뒤 내가 출판사에 새롭게 제안한 제목과 목차는 이랬다(물론 이거 말고도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제목: 편의점 온 더 블록> 1부 인생은 매회 특집 2부 누구나 주인공인 세계 3부 장르 불문의 파이팅 4부 오늘 하루 어땠나요?
제목은 인기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록'을 오마주 했다. 나는 처음이 제목을 생각하고 무릎을 탁 치며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유명 프로그램의 패러디로 친근하게 다가가면서 편의점이 가진 중의적인 의미를 동시에 표현한 것 같았다.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나 있는 편의점의 물리적 특성을 담을 수 있는 데다특정 분야를 깊이 있게 다루며 재미와 공감,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송의 포맷과 톤 앤 매너가 내 책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4부 목차별 제목도 그에 따랐다. 특정 주제로, 어떤 인물이나 분야를, 그들의 고군분투를, 시청자들의 시선으로 확장해서 보여주듯이. 편집자님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나의 의견에 적극 동조해 주었다. 그런데 어쩌다 결국 <어쩌다 편의점>이 된 걸까? 제목을 정하고 목차를 구성하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돌아보니 교정의 시간은 농부가 조금이라도 더 풍성한 수확을 위해 한 번이라도 더밭을 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