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층간소음 피해자입니다. 이 이야기 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음악(학) 전공했으니, 귀가 남달리 예민해서 그럴 거라구요? (저랑 싸우실래요?)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전에 살던 집은 철도길 옆이었고, 그래서 심지어 집값도 주변보다 살짝 싼 집이었는데, 제겐 아무 문제 없었거든요. 정말 긴 이야기이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윗집 아이들의 쿵쿵거리는, 소위 ‘발망치’ 소리를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윗집 아저씨와 여러 번 만나 이야기했고, 자주 감정이 상했습니다. 특히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라고 말할 때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거 같았습니다. “너의 무례를 나의 예민함으로 돌리지 말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연구하는 사람이잖아요. 무작정 속상하다고 화만 낼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를 객관화시키고 철저하게 파헤쳐 더 논리적으로 따져야겠다…는 아닌 것 같고, 더 잘 이해하고 싶었죠. 다양한 기사, 문헌들을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발망치‘라는 전문 용어도 알게 된 거구요. 그러다가 이 용어를 만나게 된 겁니다. ‘귀트임’이요.
이 말은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어느 순간 윗집, 아랫집 혹은 어디선가 들리는 소음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자꾸 그 소음을 의식하게 되고, 그 거슬리는 소리가 유난히 잘 들리게 된다는 거죠. 말하자면 자기가 싫어하는 그 소리에 유난히 ‘귀 기울이는’ 역설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겁니다. 이걸 ‘귀트임’이라고 하더라구요. 새로 배운 전문 용어로 써보면 이렇습니다. “일단 한번 윗집의 ‘발망치’에 ‘귀트임’이 되면, 그 후로는 더 이상 이 소리를 참을 수 없게 된다.”
가만있자… 그렇다면, 저 피를 거꾸로 솟게 하는 윗집 아저씨 말도 완전 엉터리는 아니라는 거죠. 원인 제공을 누가 했든 간에 제가 그 소리에 귀트임 된 바람에 윗집의 발망치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말도 되니까요. 그래서 반성했냐구요? 음… 앞으로 하려구요. 반성하고 사랑을 실천(‘사랑의 실천,’ 우리 학교 모토입니다)하려는 제 의지도 밤 12시 넘어서 들리는 발망치 소리에는 속절없이 사그라들고 말거든요.
아무튼, 귀트임은 신기한 현상입니다. 제가 소리연구를 하면서 여러 번 읽기도 하고 제가 쓰기도 한 일, 즉 ‘청취는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증명해 주는 일이거든요. 소리연구자들은 청취를 신비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경계합니다. 예컨대 귀라는 감각기관은 눈처럼 감을 수도 없고 어떤 것을 응시할 수도 없으니 눈보다 훨씬 수동적이며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식의 생각을 경계한다는 거죠. 소리연구자들은 청취 역시 매우 능동적이고 쉽게 편파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귀트임이 딱 그 예죠. 아무리 좋은 음악을 틀어놓아도, 일단 ‘트인’ 귀는 자꾸만 그 싫어하는 소리만을 찾아가며 듣습니다.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심지어 아이유, 블랙핑크도 소용없습니다. 이 음악들 너머 간간히 들리는 그 발망치 소리를 귀신같이 잡아낸다니까요. 청취는 원래 그렇습니다.
그런데 귀트임이 꼭 이렇게 나쁜 소리에만 일어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또 다른 귀트임 이야기를 해 보려구요. 또 제 이야깁니다. 일본 후쿠오카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일입니다. 계속되는 쇼핑과 미식 여행에 지친 우리는 공원에 가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죠. ‘오호리’라는 공원이었습니다. 이 공원은 공짜였는데요, 그 안에는 돈을 내고 들어가는 ‘일본 정원’이 따로 있었습니다. 돈 내고 들어가면 뭔가 더 좋은 것이 있을 것 같다는, 대단히 자본주의적 생각을 하며 이 일본 정원에 들어갔죠.
돌담으로 바깥과 경계 지워져 있는 이 공원은, 들어가자마자 기분 좋은 적막을 느끼게 해 줬어요. 돌담 바깥도 특별히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공원 안은 더 조용하더군요. 그런데 약 20미터쯤 걸었을까요? 어디선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앞 어딘가에 시냇물이 흐르는가 보다 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소리였죠.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또렷해지고 마침내 그 시냇물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조용하고 깨끗하고 또 한적한 공원에서 들리는 시냇물 소리는, 그 자체로 참 청량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갑자기 두 갈래 길이 나왔습니다. 시냇물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과 시냇물에서 왼쪽으로 멀어지는 길 이렇게 두 길이 나타난 거죠. 저는 일단 왼쪽으로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걸을수록 시냇물 소리가 작아지고 희미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러니까 시냇물 소리가 작아졌다고 느끼고 나서 두 발짝쯤 더 걸었을까… 그 순간에 제 앞쪽에서 또 다른 시냇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 거죠. 한 발짝쯤 더 걸었더니 이제 오른쪽 시냇물 소리는 희미해지고 왼쪽 시냇물 소리는 더 커져 이 두 소리가 거의 같은 크기로 들렸습니다. 이 두 소리는 닮았지만 또 미묘하게 달라서 그 순간 완벽한 ‘폴리포니’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은 다시 휘어져 처음 갈래길로 한 바퀴 돌아가게 되어 있었구요, 당연히 저는 또 한 번 소리가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또 폴리포니를 이루는 소리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 글로 적으니 별로 감흥이 없네요. 제겐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 보니 아주 큰 연못(호수? 아니면 그 중간?)이 나왔는데요, 역시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폭포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거였어요. 또 그 소리를 따라 걸으니 아닌 게 아니라 낙차가 50-60 센티미터 쯤 되는 작은 폭포가 숨겨져 있더라구요. 그 폭포를 지나 또 걸으니 그 소리는 희미해지고… 또 걷다 보니 앞쪽에서 또 폭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뒷쪽 폭포 소리는 희미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폴리포니, 그리고 다시 앞쪽 폭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서 뒤 폭포 소리는 페이드 아웃. 이렇게 작은 폭포가 그 연못을 둘러싸고 네 개나 있더라구요.
이 경험은 물소리에 제 귀가 ‘트이게’ 해줬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갑사 가는 길에서, 서울숲에서 사슴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인왕산에 올라가는 길에서 제 ‘트인’ 귀는 어김없이 물소리를 잡아냈구요, 그 물소리는 어김없이 기분 좋은 감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물소리가 한쪽에서만 들릴 때는 원근감을, 여러 곳에서 들릴 때는 폴리포니를 경험했구요, 잔잔한 물소리와 세찬 물소리의 차이는 깊이감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상은 갑자기 이전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변했습니다.
‘귀트임’이 어떨 때는 삶의 질을 훅 떨어뜨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세상을 훨씬 더 깊고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한다면, 귀트임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저 인간이 듣는 방식을 잘 드러내 주는 현상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귀트임에 대해 길게 글을 쓰고도 “그러니 어쩌라구?”라는 질문에 뭐 특별히 할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말이죠.
그러나 ‘귀트임’이라는 현상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 나니, 그저, “되도록 좋은 소리에 귀트임 되도록 애쓰세요”라는 허탈한 대답보다는 조금 더 나은 깨달음에 다다르게 된 것도 같습니다. 그건 바로 귀가 트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 말은 그저 우리가 때로는 나쁜 소리에, 때로는 좋은 소리에 귀가 트인다는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우리가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듣기로 한 소리, 듣게 된 소리만 주로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깨달음은 제게 좀 무섭기도 합니다. 그냥 ‘소리’라고 하지 말고 ‘말소리’라고 하면 더 선명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게 수많은 말을 했겠죠, 하고 있죠, 또 하겠죠. 제 귀는 그 모든 말소리에 트여있을까요? 내가 듣고 싶은 소리, 내가 사로잡힌 그 이야기, 내가 늘 알고 있던 그 말에만 트여있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내 귀트임이 놓친 소리들은 과연 쓸모없는 소리일까요? 절실하지 않은 것, 의미 없는 것이었을까요? 귀트임이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귀트임이 필요한 이유기도 하죠.
이쯤에서 제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더 길게 해 봐야 귀트임 되지 않는다면 듣지 않으실 테니 말이죠. 갑자기 헷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그 소설의 끝 무렵, 싯다르타의 귀는 마침내 세상의 모든 소리를 향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트임이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 수많은 세상의 소리,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어린아이의 웃음과 노인의 눈물, 이 세상의 모든 소리는 종내 하나의 소리로 합쳐집니다. 우주의 소리, 태초의 소리, 만물의 소리, 바로 ‘옴’이라는 소리로 말이죠. 그리고, 그때 싯다르타는 비로소 미소를 짓습니다.
내일이면 또 시들해질지 모르지만, 아직 1월이 다 가지 않았으니 결심해 봅니다. 나를 기분 좋게 했던 소리, 내가 듣고 싶어 했던 소리, 나한테 딱 맞는다고 생각했던 그런 소리 말고 내가 놓쳤던 소리, 무시했던 소리, 외면했던 소리들, 그런 소리들을 한번 들어보겠다고요. 그 소리들에 귀트임 되어 보겠다고 말이죠. 그 소리들의 맥락과 절실함을 다시 들어보겠다고요. 미소를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계속 그러려고 애쓰다 보면 저도 어쩌면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을지도요.
59호_VIEW 2024.01.18.
글 ∙ 정경영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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