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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Jan 29. 2024

바르셀로나 한복판에서 두 번 울었던 이유


아침에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았다.


몸살감기에 장시간비행피로가 누적된 상태로 소매치기 조심한다고 긴장한 채로 이곳저곳 많이 걸어 다녀서 피로도가 높았던 것 같다.

거기에 인스턴트 음식을 주로 먹다 보니 영양상태도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극심한 현기증에 시달렸다.




오늘 호텔 옮기는 날인데 어쩌나 싶다.

일단 새 호텔에 짐을 맡기고 한식을 먹으며 컨디션을 회복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보른지구를 떠나 새 호텔이 있는 라발지구로 향했다.

보른지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발지구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음침하고 외진 느낌이었고, 백인 노인들과 중동 남미 쪽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몸도 아픈데 뭔가 분위기가 별로여서 더 쳐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호텔에 짐을 맡기고 아시안마트에 도착했다.


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한국식품이 꽤 많았다.

유럽에 한국식품이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구색이 잘 갖춰져 있어서 황송할 지경이다.

한가득 장을 봤더니 45.1유로가 나왔다.

호텔에서 거리가 좀 있어서 두고두고 먹으려고 넉넉히 샀다.

장 본 걸 들고 한식당으로 향했다.


일찍 도착해서 조금 기다렸다가 입장했다.

한국인 여자직원 분이 반겨주시는데, 한국사람을 대면하며 대화한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매콤한 게 먹고 싶어서 12유로짜리 제육덮밥을 주문했다.

한국에서 먹는 것하고 너무 똑같아서 눈이 번쩍 뜨였다.

아까 맞아주셨던 여성직원분께서 내가 부담스럽지 않게 은근 신경을 써주시는 게 느껴졌다.

감기 걸린 상태로 매운 걸 먹었더니 콧물이 자꾸 나서 계속 코를 닦았는데 그 휴지도 다 치워주시고, 음식맛은 어떠냐며 말도 걸어주신다.


아파서 화장도 못한 상태로 돌돌이안경 쓰고 엄청 초췌하게 있어서 영 안되어 보였나 보다.

너무 친절하셔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때 눈물버튼이 눌려서 한식 맛나게 먹고 한국식품 들고 호텔로 걸어가는데 추적추적 자꾸 눈물이 났다.

몸도 아프고, 말도 잘 안 통하고, 병원 가기도 힘들고, 속으로 계속 쌓였던 게 한국인 만나서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나니 팡 터져버린 듯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걷다 보니 놀러 와서 왜 울고 있나 싶고 힘든 일이 뭐 이것만 있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스페인오기 직전까지 회사에서 사람들 속에 뒤섞여 스트레스받던 때가 떠오르며

사람마음 참 간사하다 싶어서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렇게 간신히 눈물콧물 닦고 체크인을 했다.


으아 그런데 오늘 뭔가 날 잡았나 싶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싱글룸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개미굴 같은 복도의 안쪽 깊숙한 곳이었고

도로옆 2층이라서 너무 시끄럽고 엄청 추웠다.

5박이나 예약했는데 어쩌나 싶어서 하느님부처님알라신이시여!소리가 절로 나왔다.


바로 리셉션으로 쫓아내려 가서는 안 되는 영어에 번역기를 동원하여 방을 바꿔달라고 이야기했다.


초췌한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나를 바라보던 호텔직원분이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다가 결국 높은 층에 넓은 곳으로 방을 바꿔주셨다.

돈을 더 주고라도 넓은 방을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정말 불쌍해 보였는지 싱글룸에서 트윈룸으로 무료 룸업그레이드를 해주셨다.

방을 받고 나서는 안도와 설움의 눈물이 왈칵 나서 혼자 또 징징 울다가 장 봐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나중에 몸이 좀 나아지고 나서 그 직원분께 작은 케이크를 선물로 드리면서 정말 고마웠다고(물론 번역기를 동원해) 마음을 전했다.

중년의 스페인 남자직원분이셨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펴 보이는 특유의 서양인 제스처를 하시며 '천만해!' 하고 웃으시는데 순간 무슨 영화배우 같았다.


이 아저씨 성품도 좋으신데 엄청 나이스하시네!


감사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져서 인사를 하고 후다닥 방으로 올라갔다.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도망치듯 왔던 스페인.

사람들과 지지고 볶는  너무 신물 나서 한동안은 한국인이 없을 만한 곳만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이 싫어서 피해왔던 나를 도와준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곪았던 마음에 누군가의 작은 배려라는 연고가 얹어진 덕분에

철철 흐르던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조금은 잦아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방도 잘 해결됐고, 두 번이나 실컷 울었더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여행 와서 질질 울면서 다닌 내 모습이 좀 웃겨서 웃음도 난다.


이제 푹 쉬면서 컨디션을 회복해 보자고.


침대에 누우니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계속 어지럽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해결됐네 싶다.

편히 쉴 수 있는 숙소가 있음에 감사하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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