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이상은 뉴스에 나올 수가 없다. ‘한 초등학생이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빼앗은 교사에게 다가가 싹싹 빌었습니다.’라는 소식을 기사로 썼다간 기레기라는 악플이 달릴 게 뻔하다. ‘빌었습니다’ 대신 ‘폭행했습니다’, ‘신고했습니다’ 정도는 되어야 아나운서의 입이나 기사의 손을 통해 세상에 알려질 뉴스거리가 된다.
차가 돌진하고, 땅이 꺼지고, 불이 나고, 누군가가 다치고 아프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다 보면,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온갖 사건 사고가 범람하는 세상에 이렇게 살아있는데도, 이 놀라운 일은 뉴스로 다뤄주질 않는다. 30대 놀모씨는 3억 분의 1의 확률로 선택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별 일없이 살아내며 ‘걸어 다니는 기적’을 실천 중인데도 말이다. 그저 ‘나는 존재 자체로 소중해.’라는 인스타그램 피드나 업로드하며, 아무도 관심 없는 나의 존엄함을 소심하게나마 외칠뿐이다.
동생과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완전히 벌거벗고 길을 걷고 계신 걸 목격했다. 검은 머리보단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은 헝클어진 머리에, 갈색 빛으로 그을린 얼굴과 목덜미,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얗고 굽은 어깨와 등, 마치 원시 인류 같은 모습으로 정처 없이 배회하고 계셨다. 도로 위라 멈출 수가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고 나서야 나는 그 할아버지가 치매 환자임을 깨달았다.
뉴스에나 나올법한 일을 마주했을 때, 어딘가를 배회 중인 '실종 노인 찾기 문자' 속의 노인을 눈앞에서 만난 순간, 나는 어지러웠다. 삶과의 연결이 천천히 무너지는 모습이 연민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어떤 누구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신 놓고 넘나드는 노년을 바라지는 않는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할아버지가, 자신도 모르게 쏘아 올린 공이 무겁게 내게 떨어졌다.
혼자 산 이후로는 어떤 죽음도 남일 같지가 않았다. 내 집을 아는 게 멀리서 사는 가족뿐이라는 고립감 때문도 아니고, 아침에 비몽사몽으로 일어나다가 내 발에 걸려 넘어져 바닥과 무릎이 격한 인사를 주고받아서도 아니며, 자려고 누운 밤에 문득 ‘이러다 갑자기 죽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서도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나는 자주 삶이 어서 끝나길 바랐다. 잘 살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끝을 떠올렸다. 살기 싫다는 생각으로 달아나, 나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긍정인 경우가 많다. 안돼, 안돼, 돼, 돼, 돼. 살기 싫어, 싫어, 싶어, 싶어, 살고 싶어, 그것도 엄청 잘, 완전 멋지게.
죽고 싶다는 생각은 힘든 순간을 견디는 방법이자 삶을 붙잡으려는 의지였다.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죽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지가 명확해졌다. 뭐든 죽는 것보단 나으니,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결론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낼 수 있었다. 나를 잃어간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정말로 조금씩 없어지는 사람이라는 걸, 죽음을 떠올린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죽음은 삶을 선명하게 밝혔다.
수많은 사건 사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일어나고, 불행이 36개월 할부로 찾아와 끝없이 나를 독촉하는 것도 모자라, 세상은 종종 나를 억까하며 숨 쉬듯 무례하게 굴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울고 화내고 힘들어하다가, 되지도 않게 슈렉 고양이의 눈망울을 하고 굽실대기도 하면서, 아무도 관심 없는 이 작고 귀여운 삶을 또 살아내고 있다. 기사로 쓰여 이슈몰이를 할만한 가치는 없어도 충분히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삶을. 매번 죽고 싶었을 만큼 간절히 살고 싶었다고,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냈다고 외칠 수 있는 이 소중한 삶을.
명절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한글날이네요 ㅎ 글 쓰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더 감사하고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ㅎ
(세종로 갈 때마다 세종대왕님께 마음속으로 큰절 올립니다 ㅎㅎ)
모두 즐겁고 편안한 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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