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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 밥하고 손빨래를 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by 놀마드놀


현재 사는 집은 5평 원룸이다. 강남의 몇십억 아파트가 대궐 같은 기와집이라면, 내 거주지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정도 되겠다. 초가집치고는 안전하고 따뜻하다. 밥 먹고, 잠자고, 글 쓰고, 책 읽고, 유튜브 보고, 스트레칭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울고 웃고 화내고 즐겁고 다 할 수 있으니, 희로애락도 이상 무이다.






뭐가 많이 없어요


안 그래도 뭔가를 잘 사지 않는데, 집이 좁아지는 게 싫어서 물건을 더 안 사게 된다. 이사한 지 두 달이 넘었는 데, 세탁기, 밥솥, 전자레인지, 에어컨, 옷장, 침대가 없다. 그때그때 손빨래를 하고 냄비 밥을 해 먹는다. 전자레인지가 없으니, 돌리고 먹기까지 대략 10분이면 내 허벅지와 뱃살이 됐을 냉동식품을 그나마 덜 먹게 된다. 에어컨보다 소리가 요란하긴 하지만, 제 역할을 잘 해내는 선풍기로 여름을 났다. 내 신발 개수에 비해 과분하게 큰 붙박이 신발장은 깨끗이 닦아 옷장으로 쓸모를 바꿨다. 침대 대신 요가 매트를 깔고 잠을 자니, 5천 원짜리 요가 매트가 그 값을 하고도 남는다.


처음엔 경황이 없어서 구매를 미뤘다가, 없어도 살아져서 사지 않았다. 언젠간 사야 할지 모르지만,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려 한다. 미련한 짓 그만하고 하루라도 빨리 사는 게 나으려나? 흠, 당분간은 좀 미련해 볼 예정이다.




걱정쟁이의 전화


"너 거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직업도 없고… 걱정이 안 되냐?"


아침 8시도 안 됐는데 아빠께 전화가 왔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는 물음으로 시작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직업도 없이 혼자 사는 내 처지를 걱정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흘러나와 내 현실을 일깨워준다.


아, 내가 없는 게 이렇게나 많지. 아빠의 말씀처럼 현재의 나는 없는 것투성이다. 밥솥도 없고, 세탁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직업도 없다. 이거 참, 쓰고 보니 보통 일이 아니다. 말문이 턱 막혔지만,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부지런히 브리핑해 댔다. (남보기에만 잘 다니던) 회사를 내 마음대로 그만뒀고, 그 여파가 아빠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아빠, 걱정하지 마.”


아빠는 항상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나를 걱정했다. 막 20살이 된 해의 3월, 대학 입학을 며칠 앞두고, 나이만 성인인 나를 대학교 하숙촌에 내려준 아빠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리시던 구부정한 뒷모습. 20대 중반에 첫 출근을 하는 날도, 30대 중반에 퇴사할 때도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아빠는 더 늙었고 어깨는 더 굽었지만, 자식에 대한 걱정은 늙지도 줄지도 않았다. 낯선 세상에서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을 감당해야 할 딸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구부정하게 돌아설 뿐이었다.




당신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장광설의 브리핑을 마치고, 나는 내게 물었다. ‘당신의 인생에 힘든 일과 좋은 일이 반복되는가?’는 물음에 ‘네.’라고 대답하니, ‘정상’ 판정이 내려졌다. 내리막에서 버둥대고 오르막에서 달뜨는 내 인생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건강검진이라면 의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가전도, 일도, 사람도 늘 가지고 있었다면 언제나 그렇듯 당연하게 내 삶에 존재감 없이 자리했을 것이다. 채우기만 했던 것을 빼고 나서야 갖추지 않은 소탈함을 알아버렸고, 없고 부족한 지금이 오히려 내 인생을 채워주고 있었다. 없는 동안에도 충만할 수 있다면, 인생의 내리막에서도 구르거나 떨어지지 않고 유연히 흐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손빨래를 하고, 냄비 밥을 먹으며, 글을 쓰고, 글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아빠의 걱정처럼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충실히 유영하고 있다. 아주 당연하며 지극히 정상적이고 꽤 근사하게. 그래서 난 아빠께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었다.


“아빠, 지인짜로 걱정하지 마!”









요즘 저는 투고를 계속하고 있어요.

길어지는 투고에 수시로 현타가 오고, 출판사의 찔러보기식 연락까지 더해져서 너무 힘들었는데,

브런치 글 반응이 좋아서 다시 회복했습니다!

무려 '구독자 급등 작가'가 되었어요...! (이거 꿈 아니죠?) 정말 감사합니다 ><

역시 인생은 스펙터클한 오르막 내리막의 반복인가 봅니다....!

(멀미 나지 않게 속도 조절만 좀 해줬으면...ㅎ)


이제 추석이 지나야 뵙겠네요. 미리 인사드려요. 모두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




★놀마드놀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olmad_n/

글계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맞팔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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