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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요. 아니, 나랑 동거합니다

by 놀마드놀


혼자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방구석 인생에 적합한 ‘맞춤형 인간’ 임을 깨달았다. 이사하고 한 달 동안 아파트 단지 밖을 나간 건 딱 5번이었다. 필요한 건 단지 내 편의점과 인터넷쇼핑으로 해결했다. 밤에 물건을 시키면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문 앞까지 가져다주시는 쿠팡과 마켓컬리 기사님의 부지런함 덕분에, 일용할 양식을 가만히 앉아서 받을 수 있었다. 쓰레기를 버려야 해서 아파트 분리수거장까지만 나갈 뿐, 꿀단지라도 숨겨둔 듯 칩거했다. 살면서 뭔가와 이렇게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파도에 쓸리다 보니 방구석에서 안정을 느끼는 후천적 방구석 인생이지만, 어찌 됐든 지금의 나는 혼자 틀어박히는 시공간에서 안도했다.






혼자 있기의 프로


혼자 뭘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혼밥, 혼여행, 혼자 놀기, 혼술, 혼영, 혼자 장보기, 혼자 돌아다니기 등등. 혼자 하기도 점점 레벨업을 해서, 처음엔 국밥집에서 시작한 혼밥이 이젠 혼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만렙을 찍었다. 이 정도면 뭐 성을 혼씨로 바꿔도 될 것 같다. 이젠 내 정체성이 되어버린 혼자라는 단어.


혼자 살아서 좋은 점은 예상대로 좋지만, 단점 또한 예상대로 안 좋다.


가장 좋은 건 자유에서 오는 편함과 몰입이다. 이 장점이 혼자라서 생기는 수많은 단점을 다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 편한 세상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알아버리면, 알기 전으로는 돌아가기가 힘들다.


하지만 싱크대 끝에 발가락을 찧어 아파죽겠는데도 걱정해 줄 사람이 없는 건 자유와는 별개로 서러운 일이다. 음소거로 신음하며 고통을 삭일 땐 발가락보다 마음이 더 쓰리다. 벽에 못을 박아야 하는데, “여보, 이것 좀 해줘.”하고 전동드릴을 맡길 남편이 없다. 믿을 건 그저 튼튼한 내 팔뿐이다. 귀신 꿈꾸다가 깬 새벽에 기싱꿍꼬따고 혀 짧은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천둥번개가 치는 밤에도 혼자 무서워해야 한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 날이 많다. 아무리 혼자 있는 게 좋아도 어느 정도는 말을 해야 한다. 소식좌라고 밥을 안 먹는 건 아니니까. 말로 털어야 할 에너지를 계속 쌓아만 두다가 가끔 전화를 해주는 동생에게 폭풍처럼 쏟아내곤 한다. (나의 수다 따발총 때문인지 요샌 전화가 잘 안 온다. 따흡!) 아직까진 예상했던 것들이라서 당황스럽진 않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나랑 살아요


외로움에서 나를 건져 올려준 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몰입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집중하다 보면, 나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나와 사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된다. 혼자에 적응하면 무뎌진 외로움이 남지만, 그 시간에 대한 몰입은 혼자일 때만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다. 이때 알게 된 수많은 내가 있기에,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몫을 하고 있었다. 내 삶의 주인공이자 작가이며 연출까지 맡고 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내 의지대로 써 내려갈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이 나를 몰카 하는 것 같은 대본 밖 돌발 상황도 무수히 많지만, 같은 상황도 신파가 되냐 시트콤이 되냐는 이들의 재량이 꽤 중요하다. 혹여나 우울 모드로 빠지려고 할 때마다 명랑 드라마로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가는 게, 모든 내가 힘을 합쳐서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을 혼자서도 씩씩하고 조금은 명랑한 독거처자의 생존기로 정하려 한다. 쬐금 나이는 들고 시크하지만, 긍정적이고 씩씩한 나와의 동거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To be continued :>







★놀마드 놀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olmad_n

부담없는 짧은 글을 올리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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