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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본상 행정구역이 바뀐 건 처음이라

by 놀마드놀



도망인데 도망이 아니에요


백수로 산 지 벌써 2년 반이다. 번아웃으로 1년을 쉬면서 보냈고, 잔병과 함께 한 2년 차를 지나, 기획 출판을 하려고 끊임없이 투고 중이지만, 좌절과 재시도를 반복하는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보겠다며 퇴사하고,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 시간을 보냈다.


변화무쌍한 백수 역사에 맞춰 거주지도 바뀌었다. 부모님 댁에서 살다가 백수 1년 차에 집을 나왔고, 동생과 2년을 살다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거기에 직장을 구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가느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그저 새로운 곳, 도시에 살고 싶어서라고만 대답했다. 길어진 백수 생활로 부모님께 면목이 없어 가까이 사는 게 부담이며, 예전 회사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전 회사 사람을 종종 마주치는 게 싫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글로 먹고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와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였기에 단지 도망만은 아니었다. 나를 지키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한 선언이자 출발이었다.


그렇게 5평 원룸, 거주지이자 작업실이고 도피처이면서 실험실인 현재의 집을 구했다. 오랫동안 살던 지역을 떠났고, 40년 가까이 살면서 행정 처리까지 해서 등본의 시, 도를 바꾼 건 처음이었다.





이사를 했는데, 집을 뛰쳐나왔어요


최고온도 36도, 체감온도가 38.5도까지 상승하던 7월 31일, 하필 대한민국의 365일 중에 가장 더운 날을 딱 골라 이사를 했다. 같이 살던 동생과 일정을 맞춰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폭염 경보 문자가 빽빽 울리던 7월 마지막 주에 이사 준비를 하게 됐다. 이때 얻은 열사병과 세간살이를 힘들게 이고 지고서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동쪽 끝의 남향집이라 쉬지 않고 열 마사지를 받은 데다가 몇 달간 비어 있어서 환기가 안 된 상태라 그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코딱지보다 조금 더 큰 5평짜리 집이,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에 점령당한 채 밤이 되었다. 형광등의 열기마저도 너무 뜨거워서, 방 불 대신에 화장실 전등을 간접등으로 켜놓았다. 하필 이런 때 선풍기도 더위를 먹었는지, 강풍을 눌러도 부채만도 못한 바람만 겨우 뱉어냈다. 몸 누일 공간을 대충 물티슈로 닦고, 온돌방처럼 뜨끈하게 달아오른 방바닥에서 아이스 팩을 껴안고 하룻밤을 겨우 버텼다.


더위는 사람의 인내를 시험하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나의 참을성은 급발진을 했다. 결국 그다음 날은 집을 뛰쳐나와, 낮엔 도서관, 밤은 찜질방에서 보냈다. 설상가상, 주문한 이동식 에어컨이 어마어마한 굉음 내는 탓에 반품해 버렸으니, 앞으로 이곳에서 길고 긴 여름을 어찌 보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폭염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는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에 대한 예고였다.





고생인데 고생이 아니에요


더 나아지길 바라며 이사를 왔지만, 또 다른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생을 고생이라고 정의 내린 순간 고통은 시작되고 삶은 가혹해진다. 어떤 삶을 살아도 고통은 있고, 그저 내려가고 올라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걸 안다면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진다. 내 선택을 믿고, 나를 내가 책임지기 위해 애쓴다는 자체로 고생은 인간의 품위로 변한다. 고생스러움은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품격 있는 한 걸음이었다.


에어컨을 다시 알아보다가 폭염이 지나가 버렸다. 그사이 날씨는 선풍기로 충분히 지낼 만 해져서, 4만 원짜리 선풍기를 새로 샀다. 재정비와 새로운 시작 앞에서, 내 옆엔 에어컨보다 덜 시원하고 더 요란한 선풍기가 있고, 나를 반겨주는 건 전입을 환영한다는 행정기관의 문자 하나뿐이지만, 어쩐지 조금 설렜다. 지금이 인생의 내리막길이고 고생이라면, 내리막길에서 고생으로 만들어낸 깊이는 진짜 내 것이 된다는 걸 믿고 있으니까. 내 품위가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놀마드 놀의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nolmad_n/

짧은 글을 올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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