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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삶.

by 단어

알바하러 갔는데 팀장님께서 예진이는 평일에 뭐 하고 지내냐고 물어보신다. 당황한 나는 머뭇거리다가 어... 책 읽고... 글 쓰고... 토익공부하고...? 그렇게 지내요.라고 답한다. 물론 토익 공부는 하지 않는다. 9월 한 달 깨작거리다가 책을 펴지 않은 지 오래다. 그냥 책 읽고 글만 쓴다고 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머쓱해서 토익도 슬쩍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정말 일상에 읽고 쓰는 것 외에는 꾸준히 하는 게 없다. 휴학을 한 이유가 읽고 싶은 책 마음껏 읽고, 글만 주야장천 써보려고 한 건 맞지만 정말 이렇게 글만 달고 살 줄은 몰랐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다른 것도 배우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게으른 내가 꾸준히 하고 있는 건 역시 읽고 쓰는 것뿐이다. 글을 써서 올린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수혁이를 만나고, 학생회를 하고, 수혁이를 군대에 보내고, 휴학도 하고 브런치 작가도 되었으며 지금은 방탈출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이 일들을 겪는 동안 계속 글을 썼다. 나는 뒷심이 부족해서 항상 시작은 창대하고 끝은 미약한 편인데 유일하게 글은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생긴 습관이 있다면 모든 생각을 책처럼 한다. 예를 들어 '오늘 날씨가 좋네'라는 생각을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다. 더워서 헥헥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온 것이다."라는 식이라던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너무 좋은 문장을 발견했을 때 꼭 캡처하거나 메모해 둔다. 언젠가는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내 주변의 친구들, 가족들에게 감사와 사과를 동시에 전한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글을 쓰지 못했을 것임으로. 앞으로도 나는 당신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좋아서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임으로. 혹시 자신의 이야기가 글에 등장하는 게 싫다면 꼭 고심해서 덜 멋진 문장으로 나와 대화하길 바란다. 하지만 당신들은 대부분 멋있거나, 웃기거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는 "가난한 마음"이라는 글을 썼다. 그런데 그 글을 올린 다음 날, 큰 오류를 발견해 버렸다. 내가 쓴 글 중 "담대하게 살아가는 법"이라는 글은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라는 책에 대한 글이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몇 달 전에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에 대해 찬양하고서, 오늘은 가난한 마음에 대해 쓴 것이다. 그것도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쓴 것이다. 하하. 하지만 둘 다 맞는 말이다. 가난해지지 않는 *양다솔의 마음도 갖고 싶고, 글을 쓸 때만큼은 가난한 마음으로 쓰고 싶다. 저것도 나고, 이것도 나다. 글을 쓰며 내가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 깨닫는다.


이렇듯 글은 흔적을 남긴다. 세상이 변하고, 나도 변해도 내가 한번 쓴 글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을뿐더러 없어지지도 않는다. 22살의 내가 23살이 되고, 30살이 되고 50살이 될 동안 글 속의 나는 여전히 22살이다.

하루는 내 글에서 나 이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인 수혁이와의 이야기를 쓰다가 만약에, 만약의 만약에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이 많은 글은 다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다 내려야 하나? 아니면 수혁이라는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하나? 그때는 더 이상 나의 수혁이가 아닐 테니. 그 글 속에서의 수혁이는 사라지고 없을 테니. 혹시 너의 새 애인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 애인의 사랑 역사는 아는 것보단 모르는 편이 언제나 더 낫기 때문이다. 너의 새 애인이라니. 상상만 해도 어색하다. 되도록 너의 이름이 언제나 수혁이로 존재하길 바란다. 물론 너와 내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닐 때에도 이 글은 남을 것이다. 나도, 너도, 모두 그 시간에 머물러있을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글 아닐까. 글 속의 나는 그 속에서 내내 슬플 수 있고, 내내 기쁠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주 잠시나마, 아주 순간이라도 잡아둘 수 있다.


뭐든 떠나보내는 게 쉽지 않은 나는 글을 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웃긴 일과 기막힌 일은 아주 좋은 글감이 되어 내 글에 쓰이고, 쓰이는 순간 영원으로 남는다. 그러고 나면 나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있다. 글을 쓰고 나면 떠나보낼 용기가 생긴다. 읽고 쓰는 삶은 영원을 소망하는 동시에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아는 삶이다. 그러기에 내 생이 더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글을 쓰고 얼마나 많은 순간을 떠나보내게 될까. 언제까지 쓰는 삶일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쩌면 내내 모른 채로 나는 계속 읽고 쓸 것이다.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면서.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소망하면서.



*양다솔은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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