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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Nov 25. 2023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회

피터팬 신드롬에서 벗어나기

현대인에게 피터팬 신드롬은 디폴트 값이다. 다들 어른이 되지 않으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려고 피부를 당긴다. 탈모 남성들이 괴로운 이유가 두피를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 오후>


 



 ‘피터팬 신드롬.’ 동화 ‘피터팬’에서 따온 말로, 실제로는 어른이지만 그 책임과 역할을 거부하고 어린이의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심리적 퇴행에 빠진 어른들을 일컫는 말이다. 나 역시 한참 네버랜드에 머무르는 피터팬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돼.’, ‘꼭 항상 어른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삶이 치열해질수록 그 마음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아이의 마음에 집착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나이 드는 걸 거부하며 안티-에이징 화장품을 바른다. 노화를 지연하는 각종 영양제를 섭취한다. 어른의 책임감에 짓눌린 나에게 주는 보상으로 물건을 산다. 아이였던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의 경제력으로 엄청나게 사들이는 키덜트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 화장품과 피부 시술과 영양제와 탈모 치료와 장난감을 얻을 수 있는 돈은 어디서 날까. 어린이는 노동으로 돈을 벌지 못한다. 그건 엄연히 노동법 위반이다. 가끔 광고 등으로 돈을 버는 아이도 있겠으나, 그 돈은 부모(어른)의 손에 떨어지는 법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받았던 명절 용돈은 어디로 갔나?)     

 결국 아이로서의 신체와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집요하게 어른으로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평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포기한 어른으로 살고, 가끔 아이로 돌아가 ‘이것 봐! 난 아이의 마음과 신체를 유지하고 있어!’라고 외친다. 마치 한여름 밤의 일탈처럼.

 아이가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른이 필요하다. 그러니 어른이 아이로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아이와 어른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한 명이 두 역할을 하려면 더욱 치열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어른이 된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게 된 걸까. 나는 그것이 사회에서 어른으로 사는 삶의 무게를 너무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걸 오롯이 즐기는 건 어른이 할 역할이 아니며 버티고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아이들의 권리라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책임지지 못하는 건 어른이 아니야. 먹고살기 위해 원하는 것쯤은 포기할 수 있어야 어른이야.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는 없어.”

 이렇다 보니, 토끼 같은 자식과… 까지 나가진 않더라도 일단 나 하나 책임지며 살기도 너무 버겁다. 그래도 쉽게 그 무거운 짐을 던져버릴 수 없다. 어른이니까.     

 결국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걸 버려야 한다. 어른이기에 참고 버텨야 한다고요? 그럼, 어른이길 포기합니다.


 그렇게 어른이길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겨났다. 요즘은 마치 피터팬 신드롬이 또 다른 미덕이 돼버린 듯하다. 어른이면서 동시에, 어린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게 또 다른 어른의 바람직한 모습이 된 것이다. 어린 외모를 유지하고, 아이 같은 꿈은 하나씩 품고 있고,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어른의 경제력으로 풍요롭게 누리는 게 또 다른 건강한 어른의 역할이 되었다. 맙소사! 안 그래도 무거운 삶이 더 무거워졌다.


          




 어른. 아이. 어른. 아이. 이 두 경계를 한참을 번복하다 떠올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애초에 어른과 아이의 역할과 신체, 마음을 나눌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문제는 어른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혹은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전제에서 시작되었다. 그 전제가 사라진다면 꼭 어른이 되기를 거부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스스로 책임지는 게 버거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평범한 어른이다. 꼭 어떤 성과나 성취를 이루어 내는 일이 아니라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활동을 해도 평범한 어른이다. 장난감은 아이의 물건이 아니니까 굳이 키덜트라고 나눌 필요도 없다. 남들은 다 쉽게 버티는 어떠한 것을 버티지 못해도 그냥 그것에 취약한 한 어른일 뿐이다. 정확히는 그런 사람일 뿐이다. 그게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경계가 될 수는 없다.

 즉, 아이가 되지 않은 어른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고, 꿈을 위해 사회가 맞다고 하는 길에서 벗어나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다면 우리가 굳이 어른이길 거부할 필요는 없다.






 현실은 어린이로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우리의 신체는 자라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피부는 아래로 향하고, 장기들도 노화한다. 누군가 우리를 먹여 살려주지 않으며 (만약 누군가 공짜로 우리를 먹고살게 해 주겠다고 하면 의심해야 한다. 사기꾼이거나, 우리의 자유의지를 박탈당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그냥, 어른은 어른일 뿐이다. 어른이길 거부한다고 어른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되려,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명백히 나눌수록 어른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게 된다.

 그러니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아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신 다르게 생각해 보려 한다. 그냥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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