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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Nov 18. 2023

삶을 지탱하던 것들에 대한 의심

채널을 돌릴 시간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나를 사랑하긴 하니?”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면 이해가 안 됐다. 누가 봐도 명백한데, 대체 왜 의심을 하는 거지? 너무나 더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 혹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잖아! 의심하는 사람은 더는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아직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고, 누가 봐도 사랑하는 상대에게서는 마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듯 보였다. 결국 본인도 알고 있으니까 저렇게 애쓰는 거면서. 그럼 그냥 확실히 인정하는 게 편하지 않나. 나는 공감할 수 없는 화면의 채널을 돌리곤 했다. 엄마가 리모컨을 쥐고 있을 땐 “엄만 저런 게 재밌어?”라고 구박하다 눈초리를 받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세상 냉철한 척하던 주제에, 눈물 콧물 쏙 빼며 질척이는 인간이 될 줄은. 그것도 그렇게 비웃던 이들처럼 ‘의심’에까지라도 다가가는 데 한참이 걸렸으니, 그들은 나와 비교하면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의 사무행정직에 지원했던 건, 나란 인간의 천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그런 스스로가 싫지 않았다. 적당히 얌전한 척하고 크게 사고를 안 치며 받는 소소한 칭찬을 내심 즐겼다. 재미없고 조용한, 1년 동안 딱 다섯 손가락 정도의 친구들과만 교류하는 구석진 아이의 정석이었다.

 취미도 그런 식이었다. 10년 넘게 다이어리를 쓰며 가계부를 정리하고, 특별한 일들을 기록하는 걸 즐겼다. 대학생 때는 다꾸 (다이어리 꾸미기)에 빠져 몇 시간이고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스티커를 오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조용한 게 좋고, 오래된 취미가 있으며, 붙임성이 없는 나는 스스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1. 나는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얌전했을 뿐 수업 시간에 늘 구석에 낙서하며 ‘딴짓’했지. 아, 야간자율학습도 툭하면 도망갔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취소다.)

 2. 나는 변화를 싫어한다꾸준한 단순 반복 업무가 천직이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것과 단순 반복 업무가 잘 맞는 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였다. 취미를 꾸준히 하는 것과 일을 꾸준히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3. 나는 정해진 시간에정해진 일을 하는 걸 선호한다.

 (내 신체는 9시 출근, 6시 퇴근할 때보다 비규칙적인 3교대를 할 때 훨씬 활력이 넘쳤다. 무엇보다, 공공기관의 근무 시간은 나인투식스 (9-6시)가 아닌 세븐일레븐 (7-11)이었다.)

 4. 나는 기획하는 업무가 잘 맞는 사람이다

(몰랐다. 공공기관에서 사업 기획은 수많은 사람과 만나 조율하고 합의하고 얻을 건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외향적인 인간이어야 함을.)

     


 이렇게 오해하여 선택한 직업이니, 제대로 맞았을 리가.

 규정과 형식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데, 그 비효율성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일 하나를 하려고 해도 결재-결재-결재를 받는 문서 작업을 최소 3번은 반복해야 했다. 당연히 필요하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목구멍이 막혔다. 나는 빨리빨리 민족인, 냄비근성의 한국인이었다.


 단순 반복 업무에는 권태감뿐 아니라, 불안함마저 느꼈다.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하니, 나 자신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와중에 계속되는 다른 기관과의 회의, 용역사와의 협상, 조직 내 인간관계, 모체 기관과 상사에게 해야 하는 의전에 기가 쭉쭉 빨렸다.

 기획서를 작성한다는 건 창의적 생각을 쓰는 게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휴먼명조체로 써야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강조 글씨 색은 왜 꼭 이런 시퍼런 파란색을 써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직장 사람들이 나만 보면 ‘어디 아프냐.’고 묻기 시작했다. 아뇨, 심지어 오늘 컨디션 좋은데요. (근데 왜 정작 아픈 날은 못 알아보는 거죠) 왜 이렇게 우울한 표정이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전 정말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만. (그보다 부장님, 걱정하기 전에 결제나 해주시죠.)



 하긴, 그들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이란 게 뇌를 거치기 전에 눈물부터 죽- 흘렀으니. 버티기만 하면 (웬만하면) 정년이 보장될 직장인데, 하루하루 이유 모를 불안감에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어 머리를 쥐어뜯다가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걸려 오는 업무 전화에 심장이 쿵쿵 뛰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증상이 심해져서 빈 사무실로 뛰어가 헉헉거렸다.

 그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내 인생,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거 같은데.





          

 이런 불안함에 작은 불을 붙인 게 책이었다. 퇴사 몇 개월 전부터, 나는 점심시간마다 근처 작은 도서관에 다녔는데, 사실 책을 읽으러 갔다기보다, 사람을 피해서 도망친 거였다. 조용했고, 아는 사람이 없었고, 쾌적했다. 식사 시간에 다른 직장 동료들과 밥을 먹어야 업무 공유도 하고 조직 내 정치질에 대한 정보도 얻고, 무엇보다 내 욕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걸 포기하면서도 불안하기는커녕, 낮에 햇빛을 받으며 혼자 있는 시간에서 이토록 무한한 편안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소파에서 잠을 자거나,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등만 구경하다가, 점차 한 권씩 뽑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읽은 책이 다국적기업 임원에서 태국 사원에 귀의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취직만 하면 다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힘들어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왜 힘들지? 취직했는데> 등이었다. 읽으며 눈물이 나기도, 공감이 가서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 작은 낄낄거림과 눈물이 성냥개비가 되어 틱- 희미한 불이 붙었다. 그제야 불안함의 제대로 된 형상이 보였다. ‘의심.’

    

 ‘어쩌면 나는 공공기관 사무직에 안 맞는 사람인 건 아닐까?’

 ‘정말 내가 맞는 길을 가는 거 맞아?’


     

 그즈음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어떤 것이다. 그는 사랑을 말했지만, 삶을 지탱하는 기둥에는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당시 내 상황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걸 직업에 관련지었다. 그는 다른 저서 <행복하다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에서 이런 문장을 적었다. “살다 보면 오직 자신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많아져요.”

 바로 이것들이구나. 나만 대답할 수 있는 것들. 너무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쉬이 의심을 시작할 엄두도 내기 어려운 질문들이 바로 날 지탱하는 것들이구나. 하지만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의심해야 할 것들이구나.

 먼 길을 돌아 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걸 의심하며 고통받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래 다 그렇지 않나. 연애 상담의 답은 이미 본인이 가지고 있다. 아무리 옆에서 “제발 그만 헤어져!”라고 외쳐도 소용없다. “그냥 퇴사해! 너 거기 아니야!” 친구들이 외쳐도 입을 꾹 다문 채, 비죽였던 나도 다를 바 없었다. 직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외쳤던 거겠지. “나를 사랑하긴 하니?” 사실 그도 나도 서로를 사랑한 적 따윈 없었으면서. 서로는 서로를 언제든 버리거나 떠날 수 있는 관계였다.


    

 여전히 이런 건 재미없다. 하지만 적어도 울고 질척이며, 내가 무엇을 버틸 수 없어 하는 인간인지 정도는 학습했다. 그래서 이렇게 후련하게 떠날 수 있었던 거일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이제 채널을 돌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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