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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Nov 11. 2023

과거와 현재의 나는 각자의 타인이다

회귀한다면, 다른 선택을 할까?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모든 내일은 오늘이고 모든 오늘은 내일이다. (…) 니체는 말한다. 편집은 안 돼.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네 삶을 전부 받아들이거나, 전부 잃거나 둘 중 하나야. 예외는 없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회귀물이 유행이다. 웹툰, 웹소설, 드라마에서도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이 이전 삶의 실수를 바로잡으며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해 나간다. 인물이 성장할 시간도 길게 필요하지 않고, 답답한 전개도 없다. 일명 ‘고구마 타임’이 없는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신과 같은 전능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걸 독자는 안다. 그래서 독자는 불안함 없이 기꺼이 결과를 기대한다. 과거 선택은 잘못된 것이다. 회귀한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이 내린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따금 주인공이 부수는 건작품 속 대립자()가 아닌 과거의 자신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긴 회귀물은 애초에 첫 번째 생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아 다른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작품의 기본 설정값이자 목표이니 당연하다.

      

 이런 회귀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때 다른 선택을 할까?’ 운명의 신이 개입할 운명조차 미리 알고 있기에, 그리하여 조금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 정도다. ‘문송합니다’의 문과 대신 이과에 갔을까? 친구와 반농담으로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는 (경영은 모든 분야에 쓸모가 있지만, 경영만 전공한 사람은 쓸모가 없다) 경영학과 대신 다른 전공을 선택했을까? 20대의 10년 중 절반을 써 버리고도 합격하지 못한 공무원 공부 말고, 일찍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을까? 나와 안 맞는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세 곳이나 이직, 이직, 이직하던 공공기관 대신 다른 분야의 직장을 찾았을까?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나의 대답은 결국 ‘아니’다. 이제와 다른 선택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건,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른 존재, 즉 타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반추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나와 동일인이 된다면 쉽게 선택을 번복할 수 없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후회는 내가 의지적으로 떠올린다기보다는 후회란 놈이 의지를 가지고 내 머릿속을 후벼 파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회귀해도 똑같은 선택을 내린다는 건 지금은 타인이 된 ‘과거 나’의 고민과 결정을 진심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어땠더라. 정확하게 이유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처절히 따지고, 재고, 괴로워하던 마음만은 선명하다. 몇 년 전의 나는 분명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환경, 분위기… 그러니까 가족, 친구, 경제적 상황, 사회적 인식 따위가 있었을 테다. 그리고 나의 두려움, 패기, 인정 욕구, 삶의 확실성에 대한 추구 등이 있었다. 또한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내가 있었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이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그건 지금의 나는 과거 선택의 책임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타인의 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회귀하여 다시 선택의 결과를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되었을 때, 타인의 시선에서 내린 선택과 같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라는 조언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꼭 실패자로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면 결국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에 의해 실패자로 버려질 것이다.

     

 니체의 “편집은 안 돼. 예외는 없어.”라는 과거로 돌아가도 결국 반복된다는 영원회귀가, 에릭 와이너의 “나는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똑같은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라는 말이 원망스럽다기보다는 더 위안이 되는 이유다.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은 연속적이기에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나도 포함된다. 과거의 나는 그럴 이유가 있었을 뿐이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라졌기 때문에 그 선택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거다. 그때의 삶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지금의 삶은 또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이다.  


 삶의 연속성 안에서 타인이 된다는 건 과거의 나를 버린다기보다는, 어쩌면 ‘성장’이라 부르는 것, 혹은 ‘변화’라 부르는 게 일어난 현상에 가깝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냥 자연적인 현상. 욕심을 부리자면 긍정적인 변화길 바란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로 회귀한다고 해도, 아마도 문과를 택할 테고, 여러 경험을 하고 진로를 택하고 싶다며 경영학과를 택할 테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부모님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며 공무원 공부를 할 테고, 일과 나를 잘 분리시킬 수 있다며 공공기관에 입사할 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당시, 몇 주 전 던진 사직서를 똑같이 던질 게 분명하다. 그러니 혹여 나중에 과거의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리지 말자. 입맛을 다시며 잠시 후회는 하더라도 말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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