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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Aug 29. 2023

같은 반 학우로 만났다면 인사도 안했을 엄마에게

당신의 답이 과연 나에게도 정답일까요?

엄마, 우리는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만나 싸웠지. 엄밀히 말하면 싸웠다기보단 그냥 내가 힘들어서 엄마에게 시비를 걸고 싶었던 거 같아. 원래 내가 시비를 걸고 싶었던 건 엄마가 아니라 불행해져만 가는 이 세상이었는데, 그 상황에 내 곁에 시비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엄마 밖에 없어서 엄마한테 시비를 걸었어. 참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속상했고 엄마가 이젠 마치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말하는 "아이는 네가 낳아야지"라는 말에 갑자기 화가 났어. 매일 뉴스를 보며 '이런 세상에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회의감을 한창 느끼고 있을 나에게 엄마의 그 말은 내 안에 무언가가 폭발하게 만들었거든.


내가 기억하기로 내가 엄마에게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친구들에게는 종종 말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혼자서만 간직해오던 생각이어서 이 얘기는 잘 꺼내지 않았거든. 뭐, 아무도 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지 물어보지 않기도 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의 이유를 엄마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런 걸 보면 어떤 면에서 난 아직도 엄마를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참 잘 알지. 내가 이 얘기를 하면 엄마가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았거든.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참 싫어하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그래도 어쩌겠어, 어떻게든 다 살아가. 무슨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살아." 옳다구나. 내가 아니길 바라면서도 내가 생각했던 그 반응이 나오자 나는 마치 방금 터진 활화산처럼 모든 화를 쏟아내기 시작했어. 엄마도 내가 갑자기 끝도 없이 날뛰자 같이 맞받아치기 시작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겨. 어쩜 우리의 싸움 패턴은 거의 항상 똑같을까? 그리고 항상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걸까? 나는 엄마에게 무한한 수용을 바라고, 엄마는 내 말에 불안과 위기를 느껴 애써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려 하고. 그런 두 사람의 불협화음이 계속되지. 나는 어렸을 땐 몰랐는데 크고 나니 엄마와 내가 그다지 잘 맞지는 않는 사람이란 걸 느껴. 아마 엄마와 내가 같은 반 학우로 만났다면 1년 내내 거의 인사도 안 하고 학기가 끝났을거야. 우리는 상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베스트 프렌드가 될 만큼 잘 맞지는 않지. 그 날의 싸움은 결과적으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다른 것을 요구했는지에 대하여 이해하며 끝이 나긴 했어. 그래도 10대의 나와 엄마의 싸움과 다른 점이 있다면, 10대의 나는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엄마가 왜 이렇게 반응을 하는건지도 모르고 그냥 온갖 서운함과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울분을 느꼈다면, 지금은 그래도 내가 나름 아는 것이 많아져서 어느정도 나의 기분과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서 화해가 좀 쉬운 편인 것 같아. 그래도 결론은 바뀌진 않아. 우린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


"내가 내 생각을 말하면,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너는 그렇게 느끼는구나.'라고 말을 하라고. 그 말을 생략하고 '왜 그렇게만 생각해'라고 하면 나는 엄마한테 내 생각을 부정 당하는 기분이 든다고!" 내가 그 날 울며 이렇게 소리치자 엄마는 그게 또 신경 쓰였는지 다음 날 내 침대로 와서 슬며시 물어봤지. 왜 결혼이 하기 싫은거냐고. 이런저런 이유를 설명했어. 이유는 많지... 차고도 넘쳐... 엄마는 그런 이유를 들으며 본인도 젊었을 때 그랬더라고. 그런데 그러다가 나이가 들며 그런 생활이 지겨워진 순간이 오더라고. 그 때 우연히 만난 게 아빠였고, 그렇게 아빠와 결혼하고 살아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더라고. 그러니 언젠가 그런 때가 오면 결혼해도 되지 않겠냐고,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도 외로운 세상이라고. 그렇게 말을 했어. 그리고 엄마가 지금의 나처럼 집이 있고, 직장이 있다면 본인도 결혼하기 싫었을 거 같다고, 그래서 이해한다고. 그런데 혼자 늙어갈 자식이 외로울까봐 걱정되고,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유쾌할 순 없다고 설명해줬지.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내가 엄마랑 너무 다른데도 또 너무 비슷해서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나 또한 누구보다 통제적인 사람이라 나도 가끔은 내 기준으로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가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마음을 어느정도는 이해하게 되었고, 또 동시에 내가 그런 사람이라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그들을 내 통제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건데. (여기서 또 엄마가 뭘 그런 걱정까지 하냐는 말을 할 거 같아.) 물론 엄마는 끝까지 밀어 붙이지는 않았기에 '통제'라는 단어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통제라는 건 끝끝내 관철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방향에 내 방향을 개입시키거나 첨언하는 시도 자체를 모두 통제의 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훈육 또한 통제의 일종인 것이고.


그 통제라는 건 누군가가 가진 답이 더 좋은 답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이 방향이 더 낫지 않겠냐고 개입하는 거잖아. 근데 말야, 정말 엄마가 산 삶이 나에게도 더 좋은 답일까? 아니 애초에 그 삶이 정말 엄마에게도 더 좋은 답이었을까?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해서 살았던 삶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사실 그 삶이 '더 나았다'고 할 수가 없어. 엄마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잖아. 그러니 정말 그 삶이 더 좋았을지, 혹은 아빠도, 우리도 없이 혼자서 일하면서 사는 삶이 더 즐거웠을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거야. 비교를 위해 결혼하지 않은 엄마 친구들의 삶과 비교하거나 정말 막연하게 결혼하지 않은 엄마를 상상한다고 한들 그 비교는 성립할 수 없어. 친구들의 가치관과 삶의 조건은 엄마의 것과 다르며, 결혼하지 않은 엄마가 견뎌내야 했을 세상은 또 지금과는 다르니까.


엄마가 선택해서 살았던 삶이 만족스러워서 난 정말로 기뻐. 그러나 엄마가 살아왔던 삶이 내게도 최선의 답인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 세상은 엄마가 체감도 못할 정도로 이미 너무 많이 변해버렸고, 이미 나에게도 낯설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그리고 엄마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나는 엄마의 흔적은 가지고 있지만 엄마와는 다른 사람이야. 나는 엄마가 아니야. 그러니 엄마, 엄마의 답이 내게는 더 나은 답이 아닐 수도 있어. 변해버린 세상에서 더 이상 엄마의 답이 최선이 아닐수도 있어. 엄마가 그 점을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 세상은 변했고, 그 변해버린 세상에서의 나는 엄마가 아니고, 그 세상에서 엄마의 답이 최선이 아닐수도 있다는 점. 또 엄마에게 최선이었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나는 내 방식대로 내게 더 나아보이는 답을 찾아가며 나의 최선에서 행복할 것이라 믿어줬으면 좋겠어. (이미 마음 속으로 믿고 있다면... 말로 표현을 좀 해주겠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한들 겉으로 표현하지 모르면 알 수가 없어.) 나는 또 엄마에게 나를 수용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네. 아마 나는 평생 엄마에게 그냥 무한히 수용받고 싶어할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워.


누구보다 뼈를 깎아 사랑하는 우리 앞에 항상 최선과 최고의 것들을 준비해줬던 엄마,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순간에도 한번도 우리를 관철시키지는 않았던 착한 엄마, 이제는 자식들이 본인에게 최선의 것을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스스로 잘 찾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기에 한발짝 물러설 줄도 알게된 엄마. 나와 같은 반 학우로 만났다면 1년 동안 인사 안했을 법한 사이지만 그래도 이번 생에 모녀로 만나 한 평생을 지지고 볶으면서 아직도 서로 모르고 매일 알아가는 우리 엄마. 그런 엄마에게 또 나를 이해해달라며 이렇게 편지를 남겨봐. 정말 고맙고 사랑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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