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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Sep 22. 2024

당신은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있나요?

나쁜 엄마, 좋은 이모

사촌언니가 조카를 낳고, 우연히 그 조카를 하룻밤 보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너무 예쁘고 나를 잘 따르더랬다. 그래서 그 이후 언니가 본가에 올 때면 엄마는 같이 아이를 보자고 내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베이비시터를 한 두번 하면서 느낀 건, 난 아이를 잘 봤다. 30년 살면서 심증은 있었으나 확신할 수 없었던 나의 재능, 나는 아이를 잘 본다. 아이가 원하는 바를 잘 맞춰주고, 잘 파악하며, 그에 맞춰 기다려주는 법을 안다. 아이를 닦달하지도 무작정 못하게 막지도 않는다. 그냥 조용히 내 자리를 지키면서 아이가 만지고 느끼고 싶은 세상을 한 없이 느끼도록 해준다. 그러다 위험한 순간에만 한 두번 개입한다. 그런 이모를 아이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너도 얼른 하나 낳으라며 한두마디를 거들기 시작했다. 네 자식은 더더욱 예쁘다면서. 조카를 보면서, 그 아이의 예쁜 순간들에 행복해하면서, 그 아이가 하루하루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늘어나고, 할 수 있는게 늘어가는 걸 보면서 나의 아이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나의 아이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이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결혼에 관해서는 '할만한 사람이 생기면 할 수도 있겠다'라는 입장을 취한 반면, 아이에 관해서는 강경하게 '절대로 낳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 나는 연인에게 끊임없이 이 점을 강조하고 설명했었고, 내 이상형의 조건에는 상대방 또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될 정도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은 굳건했다. 결혼을 하면, 그게 시댁이나 처가든, 혹시 배우자의 마음이 바뀌든, 누군가 아이를 갖기를 종용하는 순간이 올까봐 결혼까지 하기 싫었다.


그러나 내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하면, 이유를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연인도 그랬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자연스럽게 워킹맘의 고충이나, 경력단절, 엄마의 희생 이런 이유를 짐작해서 묻지 않는거 아닐까? 그러나 내가 아이를 낳기 싫은 이유에 저런 이유는 포함되어있지 않다. 나는 집에서 아이만 바라보는 엄마보다 자신의 일이 있는 엄마가 아이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아이를 낳게 되더라도 우는 아이를 떼어놓고라도 일을 지속할 사람이므로 경력단절의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워킹맘의 고충이나 엄마의 희생? 글쎄, 인간 하나를 그의 의지도 물어보지 않은 채 나의 선택으로 이 힘들고 거친 세상에 내어놓았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를 위해 희생하거나 고충을 겪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만한 각오는 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기에 이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온 시간들이 그닥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앞으로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 또한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쁘면 나빴지, 좋아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내가 겪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다.


내가 결론 내린 좋은 엄마란 아이의 성공과 실패를 본인의 성공과 실패로 동일화하지 않는 엄마다. 아이의 삶과 엄마의 삶을 분리할 수 있어서, 아이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엄마. 아이의 실패에 낙담하거나 불안해져서 아이를 본인의 방향대로 닦달하거나 끌고가지 않는 엄마. 아이를 위한 최소한의 장벽과 도덕적 방향성만 유지한 채, 그 외에 인생의 고진감래는 아이 스스로 찾고 겪도록 하는 엄마. 그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앞서 '집에서 아이만 바라보는 엄마보다 자신의 일이 있는 엄마가 아이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무한 경쟁의 사회인 이 사회에서, 아이의 성패를 나의 것과 분리하여 바라보는 쿨한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앞서 나는 결혼에 관해서도 '언젠가 하고싶다'는 입장이 아니라 '굳이 할 필요는 없는데, 이 생각을 뒤집을만큼 할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할 수도 있겠다'싶은 입장을 취했다. 이 또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나의 생각과 연결되는 지점인데, 내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또 다른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의 가족 외에 또 다른 긴밀한 관계를 갖고싶지 않다. 나와 긴밀할수록 나의 불안과 걱정이 더 커져가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도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 내 삶의 모든 순간에 혼자 앉아서 각종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넌 참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인데, 나의 불안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놔야하기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하곤 한다. 이처럼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별 걱정을 다하며 하루를 보내는 편인데, 보통 이런 걱정은 나에게서만 국한되지 않고, 나와 긴밀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확장된다. 가장 대표적인게 가족인데, 가족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불행한 가족 덕분에 나까지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우리 가족 구성원의 불행까지 더해 거의 하루종일 그런 걱정과 불안을 달고 사는 편이다. 그런 내게, 배우자나 자녀가 생긴다면? 나는 우리 부모님에 대한 걱정에 배우자, 자녀의 불행까지 걱정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와 내 부모에 대한 걱정만으로 도 벅찬 나는 그런 삶을 감당할 자신이 아직 없으며, 그런 걱정을 안은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예민하고 많은 요구를 하게될지 안봐도 훤하다. (이미 내 부모에게 그러고 있다.)


그러나 난 좋은 이모는 될 수 있다. 내가 아이를 보는 시간은 겨우 48시간이다. 48시간 동안 내가 아이의 실패를 얼마나 목격하겠는가, 그리고 그 실패에 나의 책임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카와 이모는 그다지 긴밀하지 않은 관계이므로 나는 그 아이 앞에서 언제나 쿨한 이모가 될 수 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라며 자율성과 독립성을 한없이 충족해줄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아이를 잘 '본다'. 그러나 내가 과연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다. 나는 지금도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나의 아이에게 최고의 상황을 주고 싶어하지 않는가. 준비된 좋은 부모를 주고자 하고 너무 큰 불행을 안기지 않는 세상을 주고자 하지 않는가. 이렇게 낳기도 전에 아이의 삶에 대한 걱정과 생각이 많은 내가 아이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은 '아니오'다. 그러나 살다가 어느 순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네'가 되는 날, 어쩌면 그 때 나는 내가 그토록 궁금한 나의 아이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런 날이 올때까지는 내가 애정하는 나의 조카에게 그저 좋은 이모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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