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공간 설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2004년 "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라는 논문을 통해 게임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젠킨스는 게임 디자이너들을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내러티브 아키텍트(Narrative Architects)"로 정의하며, "게임 디자이너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설계하고 공간을 조각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기존의 선형적 스토리텔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공간적 탐험과 비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를 중심으로 한다. 젠킨스는 게임의 내러티브가 소프트웨어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Player)와 게임 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창발 한다고 본다. 이는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고유한 내러티브 경험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환기적 내러티브는 "기존 내러티브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정의된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나 설정을 기반으로 하여 친숙함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을 통해 신선한 경험을 선사하는 방식이다. 환기적 내러티브는 집단적 무의식과 문화적 기억을 활용하여 플레이어들의 기대와 가정을 게임 공간에 투영한다. 이러한 접근법의 핵심은 기존 텍스트와의 대화를 통해 플레이어들이 이전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히거나 새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American McGee's Alice, 2000)는 환기적 내러티브의 대표적인 예시다. 이 게임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친숙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을 활용하면서도, 어둡고 비틀린 재해석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들은 원작에 대한 친숙함으로 인해 게임에 쉽게 몰입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메탈기어 솔리드(Metal Gear Solid) 시리즈도 환기적 내러티브의 훌륭한 사례다. 이 시리즈는 스파이 액션 장르의 전형적인 클리셰와 냉전 시대의 정치적 배경을 활용하면서도, 메타픽션적 요소와 제4의 벽 깨기를 통해 기존 장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실행적 내러티브는 "스토리가 캐릭터의 공간 이동을 중심으로 구조화되고, 환경의 특징들이 플롯의 궤적을 지연시키거나 가속화할 수 있는" 접근법이다. 이 방식에서는 공간적 탐험과 진행이 내러티브의 핵심 요소가 되며, 플레이어의 이동 자체가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주요 동력이 된다.
젠킨스는 실행적 내러티브에서 "마이크로내러티브(Micronarratives)"의 개념을 소개한다. 이는 지역화된 사건의 형태를 취하는 작은 단위의 서사로, 감정적으로 임팩트 있는 순간들을 제공한다.
젤다의 전설(The Legend of Zelda) 시리즈는 실행적 내러티브의 완벽한 구현체다. 링크의 모험은 하이랄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는 여행으로 구성되며, 각 던전과 지역은 고유한 테마와 도전을 제시한다. 플레이어의 공간 이동이 곧 스토리 진행이며, 환경적 퍼즐과 장애물들이 내러티브 리듬을 조절한다.
언차티드(Uncharted) 시리즈는 영화적 액션 어드벤처의 형태로 실행적 내러티브를 구현한다. 네이선 드레이크의 모험은 전 세계의 다양한 로케이션을 무대로 펼쳐지며, 각 지역의 지형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이 스토리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장된 내러티브는 "미장센 내에 정보가 포함되어 플레이어의 스토리 구성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접근법이다. 이 방식에서 게임 세계는 일종의 정보 공간, 즉 "기억의 궁전(Memory Palace)"이 된다. 플레이어는 탐정처럼 환경을 조사하고 단서를 수집하여 숨겨진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젠킨스는 탐정 소설의 구조를 예로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한다. 탐정 소설에는 두 개의 평행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수사 과정의 이야기와 이미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플레이어의 탐험 활동과 발견되는 과거의 사건들이 이중적 서사 구조를 형성한다.
미스트(Myst, 1993)는 매장된 내러티브의 대표작으로, 비어있는 듯한 섬에서 플레이어가 단서를 수집하여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하프라이프(Half-Life, 1998)는 액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매장된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블랙 메사 연구소의 환경 곳곳에는 사고 이전의 일상과 사고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산재해 있다.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 2008)는 우주선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오디오 로그, 텍스트 메시지, 환경적 단서들을 통해 네크로모프 발생 이전의 상황과 승무원들의 운명을 플레이어가 직접 발견하도록 한다.
창발적 내러티브는 "게임 공간이 내러티브 잠재력으로 풍부하게 설계되어 플레이어의 스토리 구성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접근법이다. 이 방식에서는 개발자가 특정한 스토리를 미리 작성하는 대신,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젠킨스는 심즈를 개발한 윌 라이트(Will Wright)의 표현을 인용하여 이를 "샌드박스 또는 인형의 집 게임"으로 설명한다. 이는 플레이어가 저작 환경 내에서 자신만의 목표를 정의하고 스토리를 쓸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심즈(The Sims, 2000)는 창발적 내러티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플레이어는 가상의 인물들을 창조하고 그들의 삶을 관리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관계의 드라마를 경험하게 된다. 게임 시스템 자체가 스토리를 생성하며, 플레이어의 개입과 선택이 새로운 내러티브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마인크래프트(Minecraft, 2011)는 또 다른 창발적 내러티브의 완벽한 예시다. 플레이어는 블록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자유롭게 건설하고 탐험하며,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모험과 도전, 성취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명확한 승리 조건이나 사전 정의된 스토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은 의미 있는 내러티브 경험을 창조한다.
드워프 포트리스(Dwarf Fortress, 2006)는 복잡한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통해 매 플레이마다 독특하고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를 생성한다. 절차적 세계 생성과 AI 시스템이 결합되어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놀라운 서사가 창발한다.
현대의 성공적인 게임들은 젠킨스의 네 가지 내러티브 아키텍처를 단독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위쳐 3: 와일드 헌트(The Witcher 3: Wild Hunt, 2015)는 메인 퀘스트에서는 실행적 내러티브를, 사이드 퀘스트와 환경 탐험에서는 매장된 내러티브를, 플레이어의 선택과 관계 형성에서는 창발적 내러티브 요소를 활용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Red Dead Redemption 2, 2018)는 서부 개척 시대라는 환기적 배경을 바탕으로, 아서 모건의 여정을 통한 실행적 내러티브와 세계 곳곳에 숨겨진 과거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매장된 내러티브, 그리고 플레이어의 일상적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창발적 순간들을 조화롭게 결합한다.
인용
[1] Henry Jenkins, 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 Computer, 44, 2004
[3] Video Games: Henry Jenkins, Study Rocket
[4] Heikki Tyni, Summary of “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 by Henry Jenkins, Heikiki's Game Lab, 2010. 0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