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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망심리 Dec 03. 2023

아크로폴리스에서 일어난 기억의 혼란

마망심리 사례23

지방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버스를 타고 동대문 근처를 지나며 창 밖으로 동대문이 눈에 들어올 때였다. 그때 나는 ‘교과서에 본 동대문이 실제로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제법 흐른 후, 프로이트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일어난 기억의 혼란」이라는 논문을 읽고 난 후였다. 



프로이트는 1904년 8월말에 동생과 트리에스테를 거쳐 코르푸 섬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트리에스테에서 만난 동생의 지인이 코르푸는 더워서 여행하기 힘들다며 아테네로 가라고 권유했다. 그때부터 프로이트는 우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기분으로 서성이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생과 함께 아테네 행 배표를 사서 아크로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정말로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크로폴리스가 ‘낯설게’ 느껴졌다. 프로이트는 이 경험을 분석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크로폴리스에서 일어난 기억의 혼란」(1936)이라는 논문이다. 그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아테네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에 대해 배웠는데 그때 아테네라는 도시가 실재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그것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트리에스테에서의 우울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때의 우울함은 ‘우리가 아테네를 볼 거라고?’라는 생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리에스테에서의 우울함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것은 ‘너무 좋아서 사실 같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기대하던 시험 합격 소식을 듣고 놀랄 때,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고백을 받을 때 믿을 수 없어서 놀란다. 그런 믿을 수 없음이 표현되는 것은 현실을 거부하려는 시도이다. 기다리던 일이고 좋은 일인데 왜 믿을 수 없다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앞서도 말했듯이 그는 아테네가 있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것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앞에 섰을 때, 그 가능성이 진짜 현실로 변하여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정말로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불신을 다른 방식으로 더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즉,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감각 기관을 근거로 볼 때, 나는 지금 아크로폴리스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의심은 두 번의 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이다. 나는 과거에 아테네를 의심했는데, 눈 앞에 아크로폴리스가 있으니 자신의 의심을 감각적인 것과 연결시킬 수 없으므로 의심을 과거 속으로 돌린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크로폴리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아크로폴리스 자체가 실재하는 것으로 돌린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어릴 때 아테네 방문이 불가능하다고 사고에서 제쳐 놓았던 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낯선 감성이 생겨난다. 그것은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실제가 아니야!’라는 감정이다. 낯선 감정은 어떤 것을 자신으로부터 멀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격리(억압)’한 것이고, 그것이 되돌아올 때 낯설게 느껴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격리(억압)’된 것은 어떤 표상이고, 격리(억압)된 표상이 바로 무의식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공하는 순간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외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 내적인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사실 같지 않다는 경험도 그 근저에는 그것과 같은 내적인 문제, 즉 죄의식이나 열등의식이 건드려진다. 이때 열등의식은 ‘죄의식’이 투사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모자라고 나쁘게 취급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초자아의 화신인 양심 때문이다. 아테네까지 그렇게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능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양심이 건드려지며 죄의식을 느낀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능가하려는 근원적인 죄책감이 사후적으로 건드려지면서 성공한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패한다. 여기서, 낯섦은 격리(억압)된 것의 회귀이고, 그것은 죄책감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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