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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화래진 Jul 12. 2023

나는 침대에서 쉽게 상처받는다.

  내가 누울 침대는 압정의 날카로운 부분이 하늘을 향한 채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같았다. 몸만 뉘이면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좌로 굴렀다가 우로 굴렀다가 뒤척이다 보면 어두웠던 방이 푸른빛으로 밝아지면 그때 억지로 잠에 들었다. 그 눈을 감으면 온갖 화려한 테스트 패턴 영상이 눈꺼풀 안쪽에서 보이다가 사람머리를 한 소와 사지가 꺾인 돼지머리를 한 사람 등을 연속해서 보다 스르륵 잠에 들었다.




 지난겨울은 부산에서 친구 A와 저녁을 보냈다. 그날은 유독 만족스러웠고 우리는 자기 전에 맥주를 마시며 놀다가 술을 잘 못하는 내가 얼굴이 빨개져 침대에 대자로 누웠던 밤이었다. 아~ 취한다. 그날은 말 많은 친구 A가 오만 주변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불러와 꾸역꾸역 대꾸를 하느라 귀와 입이 잔뜩 지쳐있었다. 지쳤다는 말 대신 할 수 있는 말은 취한다 뿐이었던 나는 취한다는 말을 연거푸 반복했다. 별 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한 혼잣말에 들려온 소리는 '어쩌라고'였다. 순간 5성급 호텔의 침대가 숯불구이 철판이라도 된 것처럼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른해지고 나른해졌던 시야가 일순간 선명해졌다.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그 말을 그날만 30번 넘게 참았는데!


 최근에는 다른 친구 B네 집에 놀러 갔다가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비가 와서 하룻밤 신세를 졌던 날이었다. 친구 B는 내 기준 일거수일투족을 이야기하는 친구였는데, 내 이야기에도 예외는 없었다. 만나는 남자만 있다 하면 어디서? 어떻게? 왜? 를 연달아 묻던 친구였고 나도 별생각 없이 이야기했던 사이었다. 아니,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누워있던 친구 B가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가서 전화를 받았다. 유례없던 행동에 나는 잘 준비를 하다가 전화를 받고 입을 싹 닫는 친구 B를 위해 궁금한 척 질문을 했다. 누군데 저기까지 가서 전화를 받아? '남자 친구. 더 묻지 마. 너도 저번에 다 끝나고 말해줬잖아.'

며칠을 친구 B의 이야기를 들었던 내게, 너는 말을 참 잘 들어주는 것 같아, 나는 네가 정말 좋아라며 연거푸 내게 말했던 친구 B가 본인 이야기는 더 묻지 말라며 대화를 차단했다. 아 질문은 본인만 가능한 거였나? 나는 질문할 수도 없다는 거야? 그래, 선을 그었으니 넘지 말아야지. 나도 내 선을 확실히 해야겠다는 다짐뿐이었다. 더 이상의 사적인 질문에 이전처럼 유쾌하게 대답해주진 못할 것 같았다. 그날 밤 매트리스는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가끔 우리 집 매트리스에도 불행이 묻어있는 것 같다. 스르륵 눕다 보면 그때 이렇게 말할걸, 저렇게 말할걸 하며 온통 신경 쓰이는 일들만 스르륵 내게 흡수되는 것 같다. 왼쪽으로 누우면 왼쪽에 슬픔이 닿아있는 듯하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오른똑에 온갖 걱정이 닿아있는 듯하다. 엎드리면 숨 쉬기가 힘들어 정자세로 누워 각 잡고 골똘히 생각한다. 다음부터는 내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해야지. 어쩌라고가 뭐니? 나는 그 말을 오늘 몇 번을 참았는 줄 알아? 너도 참을 줄 알아야지. 더 묻지 말라니, 너도 앞으로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가상의 친구들과 12라운드까지 마치고 다음에 할 말을 스크립트에 4페이지씩 지문을 꽉꽉 채운 후에야 마음이 편해져 잠에 든다.

좌로 눕고
우로 눕고

 서 있거나 앉아있을 때 받는 상처에는 대응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어쩐지 누워있는 상태에서는 무방비가 된다. 우선 누우면 생각하고 싶지 않고 저 사람의 공격이 귀찮다. 상대의 주먹이 내 코 끝을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그렇게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꼭 한 번씩 다시 찾아와 스쳤던 곳이 으깨진다. 요새는 복싱을 배워서 원투훅으로 처리하곤 하지만 그전까지는 들어오는 훅에 정신을 못 차리고 하룻밤을 보낸 적이 많았다. 그때 왜 누워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하는 나를 향한 원망에서 그런 말을 뱉은 친구를 향한 원망까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이토록 시간을 쓰게 되는지. 매트리스에만 누우면 행복한 기억보다 상처받은 기억이 손끝까지 구석구석 침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 전에는 꼭 매트리스에 내가 좋아하는 향기를 뿌린다. 나쁜 생각보다 좋은 생각을 하며 잠에 들 수 있도록, 목 없는 사람 말고 귀여운 양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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