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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강의 아침. 도시 산책자가 되어 볼까

센강에서 팔레 루아얄까지

by Sarah Kim

팔레 루아얄에서 하루를 연다

플라뇌르(Flâneur)란
거리를 거닐며 도시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예술적 통찰을 발견하는
산책자를 뜻합니다.

플라뇌즈(Flâneuse)란 그 여성형으로,
일상을 천천히 음미하며 도시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산책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두 단어는 성별을 넘어,
삶을 예술처럼 바라보는 태도를 지칭하는
상징이 되었답니다.


발견 : 센강 위의 아침


우리 오늘은 센 강부터 걸어볼까요? 차가운 공기가 파리의 아침을 투명하게 열어줍니다. 유람선이 강물 위로 포물선을 그리니 은빛 길이 열립니다. 햇살이 물결 위로 내려앉고, 강전체가 거울처럼 반짝입니다. 늘 똑같은 강이지만, 빛이 바뀌면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어제 본 강이 오늘의 강과 같으면서도 다른 이유입니다. 이제 강둑을 따라 걸어 볼까요. 포석 위로 구두소리가 또각또각거립니다. 발밑 돌길은 천 개의 발자국을 품은 것 처럼 단단합니다. 오늘 우리의 발걸음도 그 위에 겹쳐지고 있어요. 저쪽 빵집 문이 열리자 바게트 냄새가 불쑥 퍼집니다. 자전거를 탄 남자가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아침 러닝을 즐기는 파리지앵들의 숨소리가 파리의 아침을 리듬처럼 완성합니다. Such a Perfect Day!

파리 산책, 센 강위에서


파리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본 적 있나요. 영화 속 주인공 ‘길’이 새벽 거리에서 꿈처럼 길을 잃던 장면을 좋아합니다. 영화에서는 도시 전체가 마치 또 하나의 이야기책처럼 펼쳐집니다. 매일 흐르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이야기로, 파리의 하루가 그렇게 우리를 맞이합니다.


보들레르는 “산책자는 세상의 모든 구경꾼이자 배우”라고 했다지요. 걷는다는 건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무대 위에 서서 동시에 관객이 되는 일이에요. 바게트 냄새, 자전거 바퀴 소리, 안개와 햇살까지 이 모든 게 우리의 아침 무대를 완성하고 있네요. 그러니 걷는다는 건 단순한 이동이 아닙니다. 세상을 다시 배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에요. 빠른 걸음으로는 놓쳤던 삶의 순간 순간들을, 우리는 지금 이렇게 천천히 다 담아내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이 느린 걸음, 이게 바로 플라뇌르(Flâneur)의 길이에요. 목적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속도를 얻으면 내 안의 풍경을 잃는다! 지난 숱한 세월, 종종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놓치는 순간순간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천천히 걸으며 세상을 다시 배우는 중입니다.


팔레 루아얄 정원 ― 파리 한복판의 은밀한 무대

이제 강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 볼까요? 루브르의 웅장한 벽을 돌아 나오면, 골목 사이로 전혀 다른 풍경이 열립니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 갑자기 숨은 정원이 나타납니다. 여기가 바로 팔레 루아얄 정원이에요.



아케이드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도시는 한 걸음 물러나고, 정원의 고요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중앙의 분수에서 햇살을 머금은 물줄기가 솟아오룹니다.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진 나무들이 사각형을 이루며 서 있어요. 자연이라기보다 사람의 손길과 시간이 함께 빚어낸 건축물 같아요.


팔레루아얄 정원을 걷다, 내가 사라아는 길


저는 이 풍경을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왔답니다.

코모레비 같은 이 순간을요.

코모레비(こもれび, Komorebi)는
일본어 단어로,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코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처럼 일상 속 소중하고 반짝이는
순간 순간들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에요. 리슐리외 추기경의 궁전에서 시작해 루이 14세의 어린 시절을 품었고, 혁명 전에는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며 역사를 흔들던 무대였습니다. 몰리에르는 이곳에서 연극을 올렸고, 보들레르는 이곳을 거닐며 시를 썼습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는 이 정원을 배경으로 수많은 장면을 길어 올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는 이 길 위에는 이미 수많은 발자국과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 있지요. 특히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예뻐서! 아주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장소랍니다.


팔레 루아얄 정원 풍경


다니엘 뷔랑의 흑백 기둥 ― 시간의 틈을 열다


뷔랑의 기둥, 시간의 틈을 열다!


정원의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바닥에서 불쑥 솟아난 원형 기둥들이 높이를 달리하며 늘어서 있습니다. 표면에는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줄무늬가 반복돼요. 프랑스 현대미술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이 1986년에 설치한 작품〈Les Deux Plateaux, 흔히 “뷔랑의 기둥”>이라 불리는 설치미술입니다.


다니엘 뷔랑, 뷔랑의 기둥


처음에는 고전적인 궁전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많은 논란을 불러왔지만, 지금은 팔레 루아얄의 상징이 되었지요. 아이들은 기둥 위를 뛰어다니며 웃고, 연인들은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습니다. 여행자들은 기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체험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감상하는 작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이 스며드는 살아 있는 무대가 되어줍니다. 진짜진짜 매력적인 작품들이에요! 고전과 현대가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서 있는 이 장면, 참 파리답지 않나요? 마치 시간이 층층이 겹쳐져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아요. 걷는다는 건, 이렇게 시대와 시대를 통과하는 일이에요.


다니엘 뷔랑, 뷔랑의 기둥


벤치에서 시작된 우정 ― 에밀리와 민디


이제 잠시 벤치에 앉아볼까요? 사실 이곳은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장면으로도 유명합니다. 파리에 갈 때마다 습관처럼 보게 되는 넷플릭스 최애 드라마랍니다. 에밀리가 파리에 도착해 서툼과 외로움에 지쳐 있던 순간, 바로 이 정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죠.

코모레비 같은 일상의 순간들


그리고 그 옆으로 다가온 사람이 민디였습니다. 민디는 중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정해진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파리에 온 인물이었어요. 두 사람은 우연히 대화를 나누었고, 곧 서로의 고독을 알아보며 친구가 되었지요. 햇살은 분수 위에서 부서지고, 정원은 두 사람의 웃음을 품었습니다. 그날 팔레 루아얄은 또 다른 무대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시인이나 혁명가가 아니라, 이방인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한 순간을 위해서였지요. 걷다 보면 세렌디피티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길 위에서의 만남, 우연처럼 보이는 장면이 사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순간이 되니까요.


에밀리 파리에 가다 스틸샷


걷기 예찬


우리 이제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카페에 앉아볼까요? 골목 모퉁이에 있는 작은 카페, 오래된 간판에 낡은 나무 문이 붙어 있는 곳. 안으로 들어가면 진한 커피 향이 먼저 맞이해요. 파리지앵들은 작은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빠르게 마시거나, 크루아상에 잼을 곁들여 천천히 아침을 시작하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으면, 조금 전 우리가 걸었던 정원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이어져요. 햇살에 반짝이는 분수, 다니엘 뷔랑의 기둥 위에서 깔깔대던 아이들, 벤치에서 시작된 우정, 그리고 오래전 몰리에르와 보들레르가 남긴 흔적들까지. 모두가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살아 있는 듯하지요. 걷는 동안 깨닫게 돼요.


걷는다는 건 결국 이런 거예요. 세계와 나 사이를 잇는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다리. 길 위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타인을 발견하고, 나 자신과도 마주해요.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세계는 새로워지고, 멈출 때마다 삶의 의미가 조금 더 또렷해져요. 언젠가 당신도 이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해요. 팔레 루아얄 분수 앞에서 바람을 마시고, 줄무늬 기둥 사이를 천천히 지나고, 작은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맛보면서요. 몰리에르와 보들레르, 발자크가 그랬듯, 에밀리와 민디가 웃었던 것처럼, 당신 역시 이 무대 위의 산책자가 되기를요. 걷는다는 것은 결국, 삶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예술이에요. So, keep go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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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