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막내까지 대학입시가 끝났다는 홀가분함과 아이들 픽업 명분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취업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형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 하냐고 물어 집에서 놀고 있다고 하자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총각 때 한두 번 봤을 뿐이고 형을 통해 중소기업 관련 공기업에 부사장까지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작년 자신이 공기업을 정년 퇴임하고 스타트업 공동대표가 되었는데 회사 업무를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광교지식산업센터에 있고 지금은 이전공사 중이라 구정 지나 연락을 주겠다고 하여 이력서를 만들어 보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구정 전날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정신을 잃고 변기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아내와 아이들이 달려와 깨워 정신을 차려 보니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그 이후로 한 달 정도 공황 증상이 찾아왔다. 신경과를 찾아 뇌검사를 해보니 기립성저혈압실신이고 그 후유증으로 인한 공황증상이라며 처방을 해주었다.
연락이 오면 출근이 어렵다고 하려 했는데 다행히 3월 중순 경에 연락이 왔다. 4월부터 출근을 하라는데
그즈음 컨디션이 많이 좋아져 기쁜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입사하고 한 달 정도가 됐을 때 공동대표인
여성 대표와 갈등이 깊어졌다. 내가 광고 비용이 매출 대비 너무 크고, 광고효과를 측정하는 로아스 기준 자체가 잘못됐다고 계속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 직원들 이름 외우기도 바쁜 시간이었지만 젊어서 벤처 사업을 해본지라 회사 전반의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광고대행사 대표를 불러들여 전 직원회의를 열었다. 매월 4억 정도의 광고비가 나가는 동안의 매출 이 이상하다고 하자 정확하다며 각종 근거자료들을 보여주었다. 이때 나는 회의 들어오기 전 맞혀 본 광고비 총 입금 금액과 로아스 데이터 상 광고금액이 왜 8천만 원씩이나 차이가 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렇게 당당한 했던 대행사 대표가 말을 얼버무리며 그 금액은 다음 달로 이월돼 통장에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사실상 자신이 8천만 원을 횡령했음을 자백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작년에 입사한 마케팅 직원과 광고 대행사 대표가 짜고 광고 매출을 조작해 돈을 빼돌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흥분한 대표 형은 돈을 돌려받지 않고 소송을 하겠다며 회의를 중단했지만, 나는 8천만 원을 돌려받고
광고 대행수수료 6천만 원까지 청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내가 위임을 받아 8천을 돌려받고, 바로
퇴사한 마케팅 직원도 잘 설득해 결국 6천만 원까지 입금이 되었다. 대표 형은 나를 불러 연봉 1천만 원을 올려 주겠다고 했고, 나도 직원들에게 낙하산이라는 거부감을 없애며 얼떨결에 능력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도 비효율적 업무들과 조직문화가 문제였다. 두 대표와 직원들 사이에서 직원들 입장을 대변하다 보니 두 대표와 갈등이 커졌다. 처음엔 내 의견을 여성 대표에게 전달하던 대표 형도 어느 순간부터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창업자가 해왔던 일들을 부정하는 내 의견들이 그 형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직원에 불과했지만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주제넘음도 있었다. 결국 여성 대표와 직접
부딪히며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마음먹은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지만 한 달만 더 있어달라는 대표 형의 부탁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을 채우고 퇴사했지만 직원들과는 제법 정이 들었다. 퇴사한 다음날 우리 동네 역삼동 청음회관에 기부행사를 온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대표 형도 반가웠는지 행사가 끝나고 직원들과 한남동, 성수동 카페를 갔다가 양재천 멋진 맥주펍에서 늦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이때가 자유로운 몸으로
젊은 동료들과 직장 생활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려 했기에 그렇게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