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제네바 발명가대회 금상, 동상 수상.
삼성전자와 양측개방도어장치기술 로열티 계약 체결.
삼성물산과 공동 개발한 접철식 BOX 삼성전기에 전량 공급키로.
벤처열풍이 온 나라를 뒤엎고 있던 1996년. 우리 형도 그 한가운데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상속받은 강남 빌딩 두 채를 담보 잡아 벤처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 기술을 개발한 발명가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여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삼성전자는 냉장고 문에 양측개방도어장치 기술을 접목시키기 위해서 수억 원의 로열티 계약을 했고, 삼성전기의 하청업체들은 접철식 BOX로만 납품이 가능해져 안정적인 매출이 발생하고 있었다.
삼성그룹의 모든 하청업체들과 농협까지 우리의 환경친화적 BOX로 대체시킨다는 야침찬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당시 아이디어뱅크그룹 IBG는 희망의 끝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잘 나가는 형 회사를 뉴스나 매스컴을 통에서 접할 수 있었던 나는 형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했다.
대학 졸업 후 해태음료 인사팀에 근무하면서 훗날 형과 함께 회사를 키워 나갈 생각을 하면서 마케팅이나 기획팀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제대 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큰 형은 아버님을 대신하는 존재여서, 여러 번 나를 은행으로 불러 도장을 찍게 했지만 아무런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1997년 초부터 이상한 얘기들이 들려와 해태음료를 퇴사하고 형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회사엔 김 부장이란 사람만 남아 있었고 형은 돈 빌리러 다니기 바빴다. 내 상속 건물에만 그 당시 20억 정도의 대출이 잡혀 있었고 IMF가 터지자 한 달 이자만 3000만 원 정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때 대출 이자의 무서움을 피부 깊숙이 체험할 수 있었고 빚만 없으면 얼마나 행복할 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빚을 내서 이자를 내는 악순환을 거듭하다 결국 빌딩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 내 건물은 빚에 그냥 넘어갔고 형 건물도 팔아서 빚 청산해야 한다고 판단해 IMF 한복판에서 역사적 최저점 매도를 단행했다.
IBG는 거의 혼자 2년 넘게 운영을 했다. 삼성전기 하청업체들과 LG 물류센터에 납품을 하고 하청 공장들도
관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치 제 몸 망가지는 줄 모르고 달려가는 불나방도 같았고 우리 몸은 IMF를 지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회사를 팔기로 작정했으나 벤처 열풍이 사그라져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결국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자문 변리사에게 단돈 1억 원에 넘겼다. 우리가 투자했던 금액의 2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다행이라 생각했고, 그 당시 20억 정도에 판 빌딩들은 지금 20배가 훨씬 넘게 올라있다.
상속받은 건물은 한 번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 이후 나는 증권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