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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Sep 16. 2024

알지도 못하는데 오지랖

다른 사람의 고난에 겸손한 마음 갖기

Intro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유별난 아이를 만난다. 특히 부모들 가운데 자기 자녀 교육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쉽게 충고를 해주곤 한다. "니가 잘못 교육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잘만 교육한다면 어떤 유별난 아이라 하더라도 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때로는 해롭다. 많은 유별난 아이들을 바르게 세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각 상황과 환경, 아이의 특별함을 모르고, "아이가 이상하다면 부모가 잘못 교육한 것"이라는 율법주의 잣대로 부모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때로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후벼판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얘 왜 이러냐?"는 답이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일천한 자신의 경험으로 "너는 잘못 가르친 거야"라고 쉽게 비난했는데, 실제로 맡아보니 자기도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자기가 키우지 않는 이상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일천한 지식으로 이 세상을 다 이해한다는 생각은 순진한데다가 율법주의적 자세를 배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욥기 이야기


여기서 욥기 이야기를 계속 묵상해 왔지만, 사실 욥기가 말하는 게 그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천한 지식으로 쉽게 충고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번영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착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나쁜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실제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신 욥도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물론 반대도 있을 것이다. 나쁜 사람들이 잘 살고, 착한 사람들은 가난해진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펼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에 대해 하나님이 신원하신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이 있고, 때때로 우리는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영원히 정의가 바로 선 나라가 세워진다.


즉, 다양한 면모를 보이는 이 세상을 자신이 가진 일천한 지식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언제나 하나만 아는 사람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들이 이렇게 일천한 지식으로 쉽게 사람들을 평가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하나를 깨우친 청년들이 주로 교회를 욕하고, 주변 사람들을 욕하는 율법주의자가 된다.




설교자


내 경험에 의하면, 가면 갈수록 청년들을 지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다른 말로 다시 말하자면, 청년부 사역자가 가장 쉽지 않다. 다른 부서에서 인정 받고 청년부를 시작한 많은 사역자들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청년부를 맡았을 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청년들이 내 욕을 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어떤 분명히 드러나는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설교에 대한 비난도 엄청 났다고 한다. 그래서 좀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청년부 예배에 참석해보고는, 도대체 이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면서 의아해 했었다.


(그리고 내가 사임하고 났더니, 청년들이 그렇게 그리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있던 또 다른 목사님이 "있을 때 잘하지"라면서 혀를 찼던 게 기억이 난다.)


너무 답답해서, 청년부 수련회 때 강사로 자신감 넘치던 지인 목사를 섭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지인 목사가 "니가 변증 설교를 해서 그래"라는 거다. 그러면서 "그냥 선포해"라며 비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당황스러웠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나는 변증 설교보다 비유 설교 위주의 설교를 한다는 점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청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예화로 설명하곤 했었다. 그런데 내 설교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지인 목사가 허수아비 논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인 목사의 설교는 청년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을까? 놀랍게도 청년들 사이에서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 꼰대 목사라며, 진짜 설교가 별로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는 거다. 자기가 청년들을 잘 안다면서 전문가인 것처럼 이야기를 해놓은 것치고 청년들의 반응이 극단적이었다.


물론 설교자를 쉽게 판단하던 청년들의 자세가 잘했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설교를 잘하면 아무리 유별난 성도라도 설교에 감화를 받는다"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내 설교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과 똑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 설교 능력을 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설교를 (심지어 들어보지도 않고) 쉽게 비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항상 느끼는 거지만, 똑같은 설교, 똑같은 상황, 똑같은 청중이라 하더라도 그 반응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부모가 똑같은 방법론으로 키우더라도 아이의 반응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방법론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 즉, 설교 방법론이나 교육적 방법론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안 쓰니 실패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빠져 있다. "이 방법론만 쓰면 성공하는데" 왜 안 써서 실패하냐는 거다. 이 방법론을 쓰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방법론을 잘못 적용했다"라고 말한다.


자기계발서들이 하는 말이 딱 이렇다. "이렇게 살면 성공한다"는 거다. 그러나 이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거다. 그러나, 똑같은 방법론이라도 상황과 사람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내 실력과 능력으로 성공한 거 같다. 성도들이 설교를 잘 듣거나, 자녀들이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성도들이나 자녀들이 잘 자라게 하신 것이다. 내가 다른 아이를 맡았다면, 그 아이를 완전히 망칠(spoil)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세대 차이를 바라보면서 이 사실을 깨닫곤 한다. 특히나 MZ세대라는 이름으로, 회사에서 이전에 통하던 사원 관리 방식이 현 세대 청년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걸 볼 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이전에 성공했던 사원 관리 방식은 (물론 노력도 있었겠지만) 운이 좋았던 것이다.




올바른 자세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키운 자녀들에 대해 "내가 잘 키웠다"며 자신감을 가지기보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즉, 내가 해낸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 대해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는 "잘 커줘서 고맙다"며, 또 하나님에게는 "잘 키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다양한) 실패에 대해서도 우리는 겸손하게 다가가야 한다. 물론, 그 사람이 게을러서 실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실패했을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서 "니가 잘못 가르쳐서 아이가 이 모양이 된 거야"라고 하든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망한 거야"라고 말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왜냐면, 나는 그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이 되었을 때 더 잘할 것이라고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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