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난 리나
자카르타 호스트인 리나의 침대는 포근하게 내 몸을 침대 시트로 빨려 들어가게 했다.
푹신한 구름 위에 잠깐 눈을 붙였다 뜨니 창문으로 날이 밝은 게 보인다.
아침 일찍 출근한 리나의 빈자리를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가 채운다.
집 근처에 사원이 하나였던 바탐과 달리, 자카르타 시내 곳곳에 있는 사원은 너도나도 기도 소리를 낸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섞이고 섞여 신호가 잡히지 않는 텔레비전 안에 갇힌 느낌을 만든다.
엄마는 그동안 내게 못 해줬던 게 미안하다며 수화기 너머로 사과했다.
우리 딸이 세계에 대한 갈망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딸의 행보를 보며 자기도 설렘을 느낀다고.
보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엄마와의 대화는 끝이 났지만,
엄마의 말은 눈물과 함께 내 마음에 계속해서 울린다.
나의 조그만 움직임이 누군가에게 설렘을 주고 힘이 된다는 사실은 기적 같게 느껴진다.
자카르타에 오니, 바탐보다 훨씬 많은 오토바이가 도로 위를 주행하고 있다.
수많은 오토바이는 저마다 아슬아슬하게 도로 위를 달린다.
오토바이에 앉아 옆에서 쌩쌩 달리는 차를 스쳐 지나간다.
이 아찔함은 인도네시아에서만 느낄 수 있으려나.
생각하면 할수록 도로 위의 이 순간이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많은 양의 포댓자루가 담긴 수레를 세 명의 노동자가 끌고 있다.
이를 악무느라 잔뜩 찡그려진 주름을 타고 땀이 흘러내린다.
해진 신발과 오랫동안 빨지 않은 유니폼은 그들 몸에 대충 걸쳐져 있다.
아침 일찍부터 잔뜩 힘을 주며 일하는 이들은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받을까.
무한정 표류 상태가 되어 멍을 때리다 보면 그랩 운전사는 도착했다고 알린다.
경적을 울리는 자카르타 시내에 있다가 TMII에 오니 서울 숲 느낌이 물씬 난다.
1,300개 이상의 민족이 사는 인도네시아는 지역과 언어도 700여 개에 달한다.
단일민족을 운운하던 한국에 살다 온 여행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박물관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기도
박물관 가운데에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도
뚜껑이 비닐로 된 음료수를 여러 개 담아둔 쟁반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네를 구경하기도
함께 놀러 온 가족을 보며 웃음을 짓기도 한다.
작동하지 않는 유심은 내게 머무름을 주었다.
말인즉슨, 와이파이를 구걸하며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흔쾌히 자신의 데이터와 웃음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잠시 눈을 맞추어 인사하고 미소를 주고받는 머무름을 준다.
불편하다면, 불편한 이 여행방식이 앞으로 내 여행에서 수많은 인연을 만나게 해 주었고,
난 이 방식을 더 이상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유심이 가져다준 인연과 미소를 나누던 중, 리나와 만났다.
리나는 자카르타 시내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자카르타에서 유명하다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비롯해 야시장 곳곳을 돌았다.
아이스크림 가게 손님에게 노래를 불러주기 위해 들린 음악가분은 월량대표아적심 첨밀밀을 부른다.
어릴 적, 엄마가 부엌에서 요리를 만들며 부르곤 하던 노래다.
이른 아침, 엄마와 통화가 떠오르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코가 찡해진다.
야시장에서 갖가지 음식을 사 자카르타 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리나는 컨설팅 쪽에서 일을 하다 지금은 외교부에서 일을 하고 있다.
훗날 자신을 위해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우린 나시고랭과 과자를 먹으며 요즈음 하는 생각과 고민, 각자 삶에 관해 이야기 나눈다.
나시(밥)와 함께 과자를 먹는 식습관을 가진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신기하게만 느껴졌다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바삭한 과자의 맛에 흠뻑 빠진 나 자신을 만난다.
법적으로 무교가 성립되지 않는 인도네시아 대부분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리나 삶에서도 종교가 많은 영향을 갖고 있었다.
"리나,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고 싶어?"
리나는 답했다.
"난 다시 태어나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고 싶어. 지금도 난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게 좋아."
교육열이 뜨겁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자연, 선조가 남긴 문화유산이 있다는 점 등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국가에 대한 좋은 점을 열거한다.
질문하면서도 이미 리나의 답을 예상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잘 나가는 선진국을 이야기하며 더 좋은 기회를 추구할 거라는 답변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여행을 시작하며 국가의 성장과 힘이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크게 실감했고,
상대적으로 성장이 더 필요한 국가일수록 선진국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삶을 비관할 거로 생각했다.
거만하고 오만한 생각이 나도 모르게 은밀히 내 생각에 침투해 있었다.
리나의 답변과 삶은 내 생각에 은밀히 존재하는 조각을 깨뜨린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자세이구나.
나고 자란 공간에 감사하고 소중함을 느낄 줄 아는 자세이구나.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고 사는 건 아니었을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
리나에게 삶의 이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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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유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야.
내가 믿는 종교에서 자신이 다시 태어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믿음이 있어.
나는 내가 다시 태어나길 선택했기에 이곳에 있잖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내가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한 이유.
이전의 내 삶이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한 그 이유,
내 삶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게 될지 알아내고 싶어.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안고 있던 그와의 대화는 공원의 무더운 공기에서도 밤이 늦도록 앉아있게 한다.
무덥고 습한 공기를 뚫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공원은 폐장 시간이 되었는지 시끄러운 사이렌을 울린다.
족자카르타로 갈 기차 시간이 다 되어 우리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다.
리나는 기차역 게이트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다시 하지 못할 수도 있을 포옹을 했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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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