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증이 올 수밖에 없다.
23년 결혼기념일로 도쿄여행을 다녀왔을 때 일본에서 닷사이 23을 2병 사 왔다. 사케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워낙 인기 있는 술이고 한국 이자카야에서 맛보려면 20만 원이 넘는 돈을 줘야 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샀다. 당시 술을 구매했을 때 와이프와 꼭 같이 먹고 싶어서 출산 후 아이 100일쯤 지났을 때 먹을 계획이었다. 오늘 새벽 이 계획이 틀어졌다. 와이프와 아이를 재우고 대화를 하는데 우울증 초기 증세가 보였다. 출산한 산모들이 대부분 겪는 산후우울증이 시작되는 거 같았다.
갑자기 아내가 말한다."요즘 뭘 해도 우울하고 아이가 미워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그러면서 나한테 묻는다."오빠는 정말 딴딴이가 미웠던 적이 없어? 아무리 울어도 괜찮아?"나는 이미 예상한 고통은 웃어넘길 수 있다고 답했다. 아내는 이런 내가 부러웠는지 하나둘씩 힘든 점을 말했다. 우선 사람을 만나기가 싫다고 한다. 외모가 망가진 자기 모습이 초라하기도 하지만 누구를 만나서 에너지를 쏟는 게 무섭고 밖을 나가기조차 싫다고 한다. 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나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다고 한다. 의존이 커짐과 동시에 미움도 커지는데 조금만 자기 맘에 안 들면 더 예민해진다고 하는데 슬펐다. 우리 부부는 극 E였는데 임신과 출산의 과정 동안 통제된 생활이 아내가 세상과 등지게 만들었다.
본인도 정신의학과 상담을 받아보고 싶지만 보수적인 사람이라 무섭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누가 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물어볼 곳도 없는 게 답답하다고... 가볍게 농담을 던진다."넌 잘하고 있어. 힘들지? 오빠가 첫 번째 경험한 아이라 나도 부족함이 많아서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 두 번째였다면 달랐을 텐데 "표정이 좋지 않다. 처음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청소나 위생 등에 대한 강박이 강했지만 더 심해졌다. 오늘 그래도 1년 만에 단 둘이 술을 한 잔 하면서 그동안 마음속에 묵혀둔 이야기를 하나 둘 했다. 내가 쓴 일기장을 보여주면서 나도 마냥 웃고 즐겁지 않고 너처럼 힘들고 그렇다며 단지 잘 버티는 힘이 있을 뿐임을 알려주면서 잘하고 있고 설령 못해도 어떠냐며 괜찮다고 안아줬다.
사케에서 느껴지는 꽃향기와 부드러운 목 넘김에 묘하게 느껴지는 알코올의 알싸함과 함께 취기가 올라온다. 와이프도 술맛이 부드럽다며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쉽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복숭아와 바나나로 대체했다. 술이 어느 정도 단 느낌이 있어서 과일과는 그렇게 어울리진 않았다. 오늘 아내의 깊은 속마음을 듣고 걱정이 많아졌다. 내가 더 큰 책무를 갖고 가정을 돌봐야겠다. 물론 내가 지치면 안 되니 나도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마지막 잔을 한 잔 들이켜면서 와이프에게 공책 한 권을 선물했다. 매일 약속 하나만 해달라며, 나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고 짧은 글이어도 좋으니 본인에 대한 칭찬과 사랑의 말을 3개만 적어두라고 했다. 다행히 적었다. 뭘 적었는지 궁금하지만.. 나중에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모처럼 술과 함께 진대를 했더니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을 빨리 가고 싶어졌다. 자기 전에 같이 떠난 여행 영상을 보며 과거 즐거웠던 기억에 대한 향수에 빠졌다. 시간이 약이다. 조금만 더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