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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07. 2024

시에스타를 즐기세요, 스페인

후반전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

스페인 여행을 오기 전 잘 숙지했지만

막상 닥치니 당황스러웠던 것은 씨에스타였다.

점심시간 후 저녁시간 전에 가지는 조금 긴 휴식시간.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노동했다가는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기 일쑤이니

해가 가장 뜨거울 때는 그늘로 피신해 휴식하는데서 비롯된 문화.


한국이나 다른 국가의 레스토랑 브레이크타임 정도로 생각했다가는 큰 낭패를 겪을 수 있다.

레스토랑뿐 아니라 동네 슈퍼까지도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그저 문만 닫는 게 아니라 셔터까지 내려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를 넘어

휴식 시긴을 절대 방해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보였다.


그럼 우리도 좀 쉬자며 숙소에 돌아오는 길,

필요한 물과 스낵 같은 것을 사려고 슈퍼에 갔으나

찾아간 슈퍼는 모두 셔터까지 내려져

한낮의 햇살 아래 그 거리는 새벽 2~3시를 연상시켰다.


나 혼자 두고 모두 어딘가로 사라진 골목

발을 헛디뎌 평행우주 어딘가로 떨어져 버린 미아가 된 기분으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그곳은 적막했다.

밝은 대낮이지만 늦은 밤 같은 골목은 생경한 두려움을 만들었다.

쌀쌀한 12월이라 길 위에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기라도 하면

모래바람만 안 불었지 어릴 때 봤던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정말 다행인 건 외로운 우주로 떨어져 나처럼 당황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는 것.

우리는 당장 목이 말라 물을 어디서 구할지 고민하다,

시에스타 시간 동안 음료만 판매하는 곳을 겨우 찾아 무알콜맥주와 콜라로 목을 적셨다.


이 시간이 좀 익숙해질 때쯤 되자

적막한 동네를 홀로 즐기기 시작했다.

낮잠을 청하러 숙소에 간 친구와 헤어져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윌스미스가 된 기분으로

해가 지면 좀비처럼 나타나는 변종 인류를 피해

혼자만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사람들이 사라진 골목을 탐험했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곳곳은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와인과 맥주와 함께 음식을 즐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생소했다.

하지만 겨우 두세 시간 후면 마른 사막에 비가 온 뒤처럼

숨어있던 생명체들이 나타날 것이다.

바싹 말라버린 씨앗에서는 새싹이 나고,

모래 속에 숨어있던 알은 촉촉해지면서

물고기가 태어날 것이다.

그때부터 자정이 넘는 늦은 밤까지

골목은 펄떡이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문을 닫은 저 가게 안에서는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 지속되고 있을 것만 같아

셔터를 올리고 불쑥 방해하고 싶은 장난기가 생겼다.

저 문 뒤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니 시에스타 시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잠시 휴식하며 후반전을 준비해야 한다.

그늘아래 의자나 소파에 기대 낮잠을 자도 좋고

음악을 듣거나 밀린 책을 봐도 좋다

친구와 가족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명상을 해도 좋다.


조금 게을러져 보는 거다.

그래야 인생 후반전 힘을 내 오래 달릴 수 있다.

뜨거워진 엔진에는 시원한 물을 끼얹고

바닥을 드러낸 연료통을 가득 채워야 한다.

어설프게 쉬었다간 더 힘들어지니

쉬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다시 태어난 물고기는

팔딱이는 생명력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듯 오후를 시작할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인생도

오후 2시 강렬한 태양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때에는

에너지를 다 소모해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을 때는

셔터를 내리고 그늘에서 쉬는 용기를 내어보자.

그래도 된다.

정말 그래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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