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회사원의 때를 아직도 못 벗은 것
그녀의 볼은 살짝 발그레하고 피부는 전체적으로 하얘서 복숭아가 생각나는 얼굴이다. 입술은 도톰하고 무엇보다 동그랗게 뜬 눈이 인상적이다. 그 눈 위로 긴 속눈썹이 보였고 자세히 보면 좌우 눈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얼핏 보면 똑같은 눈인데 한참을 쳐다보면 왼쪽 눈은 옆으로 조금 더 길고 오른쪽 눈은 위로 좀 더 크게 떠지는 듯했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그것도 두 눈을 길게 쳐다보지 못했는데, 불편함을 견디고 어렵게 그녀를 길게 쳐다보았다. 웃을 때는 눈 옆에 살짝 주름이 지고 입술 양옆이 함께 올라가 광대가 조금 더 볼록 솟아올랐다. 마주 보다 함께 웃게 되는 얼굴이다. 그러나 진지해져 웃음기가 사라졌을 때는 동그란 두 눈이 내 눈을 통과해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몇 번 그 눈길을 피해 음식을 쳐다보거나 물 잔을 들어마시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그녀의 눈에서 어떤 의도를 찾지 못해서인 듯하다.
그녀는 올해 봄 사진 스터디에서 처음 만났다. 종종 얼굴을 마주쳤고, 스터디에 나오지 못할 땐 다른 사람을 통해 동향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사진스터디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9월 후반 즈음 메신저로 보냈었다. 그랬더니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다며 따로 얼굴 보자고 자연스럽게 식사 약속을 잡게 되었다.
20년간의 사회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광고주, 광고대행사 담당자, 컨설팅펌 직원, 리서치회사 매니저, 기자, 자영업 사장님, 인플루언서, 크고 작은 회사의 마케터들. 대부분 명함을 동반한 미팅이었다. 같이 일할 사람이 어떤 스타일인지, 그 회사나 팀의 동태를 자연스럽게 살피기 위해 식사나 티타임을 권하기도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선 평가나 그 후의 일을 잘 부탁하기 위해 만나기도 했다. 일부는 업무와 상관없는 친목 도모로 만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업계를 떠나지 않는 한 보고 또 볼 사이라, 어떻게든 엮일 수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만남은 업무의 연장, 혹은 자기 계발을 위한 네트워킹의 일부였다. 그러니 대체로 그런 자리에서는 사회생활용 '프로페셔널 로란' 마스크를 썼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하려고 노력했고 대화 속에 어색한 공백이 없게 물 흐르듯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일로 만나는 것이든 개인적인 만남이든 좋은 만남이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썼다.
퇴사한 지 일 년 반이 지났지만 업계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들부터의 연락은 그래서 대체로 이유가 확실했다. 이직을 고려 중이거나, 인맥 동원이 필요하거나, 퇴사 후 바깥세상은 어떤지가 궁금하거나. 오랜만의 연락에는 어색함이나 미안함이 뒤따른다. 필요할 때만 연락한다는 퉁명스러운 불만과 바쁘지만 지금이라도 연락하니 좋은 거 아니냐는 변명이 소리 없이 핸드폰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그건 대체로 최근 근황을 묻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곤 한다. 그러니 본론으로 넘어가는 것이 편하다. 어떻게 지내느냐라는 말에 진심으로 답하기에는 한두 문장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게 수다 떨듯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조금 궁금해졌다. 왜 따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을까. 내가 있었던 업계가 궁금한 걸까? 아니면 뭔가 조언이 필요한 걸까? 지인 중에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난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경복궁역 근처 찻집을 찾았다. 약속시간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았고 밤이라 커피 말고 카페인이 없는 따뜻하고 맛있는 차가 마시고 싶었다. 차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리다 생각나는 글감이 있어 휴대용 키보드를 꺼내 브런치에 글을 썼다. 주제는 '생선을 잘 발라먹는 아이'였다. 잊을 수 없는 옛날 그 아이에 대해 한창 쓰다 보니 동글동글하고 하얀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자리를 옮긴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시키고 잠시 고민하다 샐러드도 시켰다. 둘만 만나는 건 처음이었고, 식성을 몰랐다. 혹시 탄수화물 제한 식이요법을 하는지, 채식을 하는지도 서로 물어봤다. 술을 마시는지? 와인을 마실건지도 물어보았다. 그러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을 물어보았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녀가 일하는 갤러리가 어딘지를 알게 되었고 조만간 놀러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언제부터 글을 쓰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녀는 꽤 오랫동안 매일 일기를 쓰지만 브런치 같은 곳에 공유하기는 겁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고, 나는 그게 뭔가에 집중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버렸다면 좋아하는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오랫동안 같은 일을 했다는 것에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녀에게 굳이 맞지 않는 일이라면 버티지 않고 러닝머신에서 내려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사진 스터디에서 만나 서로의 눈을 길게 들여다보고 포트레이트를 찍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질문에 질문이 이어졌고, 감탄을 하고 나름의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너무 꼰데 같은 이야기를 한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 이제와 갑작스럽게 들었다.
그녀가 나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이슬아, 남궁인의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책을 보다 내가 문득 생각났다고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그 작가의 문체를 보면 내 어투나 말이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보고 그 문체를 좋아하던 나는 진심으로 그 이야기가 반가웠다. 책리뷰를 쓸 때 읽으며 흠뻑 빠졌던 책은 나도 모르게 작가의 문체를 따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이슬아작가의 문체도 그렇게 따라 해보고 싶었다고, 그 말을 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쉽게도 그녀가 이야기한 책을 읽지는 않아 조만간 꼭 읽어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슬아 작가의 문체 이야기에 내가 혼이 팔렸던 걸까, 언니인 내가 밥을 사야지 하고 작정했었는데 잠시 정신이 없는 사이 그녀가 재빠르게 신용카드를 꺼내 결제를 해버렸다. 내 입에선 "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럼 너무 미안한데."라는 말만 소용돌이쳤다. 사회생활 20년에 신용카드 내는 순서를 뺏긴 건 처음이었다. 나이스한 영업기술의 하나로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눈치채지 못하게 스무스하게 결제를 순식간에 해버리는 것. 참치대뱃살을 예리한 칼로 소리 없이 잘라 초밥을 만들어내는 기술처럼 카드 먼저 결제하기 기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었는데. 아차, 한 명 있었다. 전 직장 내 매니저. 아무튼 이 기술이 벌써 녹이 슬어버렸다. 아무래도 회사를 퇴사한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그녀는 당황해하는 내 모습에 "혹시 이게 예의에 어긋나는 걸까요?"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요. 그냥 당황했을 뿐이에요. 내가 살려고 했거든요." 이유 없는 만남 요청이나, 이슬아작가 책을 보다 내가 생각났다는 이야기나, 누가 나보다 빨리 신용카드를 꺼내는 것이나, 그것도 한참 어린 동생 같은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들이 두 시간 사이 순식간에 쏟아져 정신이 없었다. 프로페셔널 로란을 꺼내 들 필요가 없었지만, 꺼내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했고, 편한 것 같으면서도 당황스러운 전개에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정신이 없었다.
식사 중에 그녀가 물었다.
"사진 스터디에는 왜 계속 나오시는 거예요?"
"신선하거든요. 회사만 오래 다녔더니, 그렇게 감각을 깨우는 경험도 그리고 그걸 위해 오시는 분들을 만나는 것도 저는 모두 너무 신선해요."
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서로 비슷비슷한 부류였나 보다. 감정과 감성을 공유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 회색 무리들을 만나고 회색 감각에만 날을 세우다 보니, 다른 색이 있다는 것도 다른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었다. 그러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나 매번 깜짝 놀라고 있다. 바다를 처음 본 아이가 철썩이는 바닷물에 발을 넣어보고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다가 다시 다가가 바닷물에 손을 넣어보고 물장난을 치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구경하고 탐구하는 것. 회사 밖 세상에 대해 꽤 많이 알아가고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만나고서 나는 또 새로운 바다를 만났다.
식사가 끝나고 경복궁역을 건너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내가 와인을 사기로 했다. 와인의 향에 기대어 프로페셔널 로란 가면을 처음부터 내려놓고 두런두런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헤어지자마자 서둘러 발걸음을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야기한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샀다. 그 책의 독후감은 아마도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