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많은 너와 그 틈을 애정하는 나
"로란님, 우리 제주도 한라산 갈래요?"
우리의 인연은 그때부터가 진짜였던 것 같아.
한라산을 가기 전에도 매일 회사에서 마주쳤고
예쁜 옷이나 신발에는 어디서 샀느냐 호들갑을 떨었고
궁금한 것들이 생기면 밤에도 통화를 했지만 말이야.
그저 좀 가까운 회사 지인 정도로 생각했던 너에게
훅 들어온 여행 제안이 반갑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썩 괜찮았었어.
하이톤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나는 네가 틈이 없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제주도 어느 카페에서의 일이었어.
너는 커피잔을 반납하겠다고 일어서다가
실수로 잔을 떨어뜨려 카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았었지.
어디 그뿐인가.
숙소에 돌아온 저녁, 와인을 준비하다 마시기도 전에 잔을 하나 깨 먹었지.
완벽해 보였던 너에게 발견한 그 틈은
헤집고 들어가도 괜찮을 만큼 슬슬 벌어지기 시작했어.
어느덧 몇 번의 여행이 밀푀유처럼 겹겹이 쌓여
기억은 점점 달달해지고 비슷해질 때 즈음
우리는 함께 스페인을 갔어.
첫 숙소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었는데
나는 거실 중앙에 있던 커다란 식탁을 보자마자
그 위에 있던 화분이랑 뭔가 애매하게 예쁘다 만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어.
그리고 내 화장품이랑 헤어드라이어, 약 파우치 같은 걸 올려두기 시작했지.
거긴 마땅한 화장대나 파우더룸 같은 게 없었거든.
그때 너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이내 "나 이런 거 너무 좋아~!" 라며
식탁 어지르기에 곧 합류했지.
우리는 알고 보니
둘 다 잠이 많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어.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쁜 쓰레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고.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너는 사진 찍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지.
너는 와인, 나는 맥주
휴식시간에 나는 글을 쓰고 너는 책을 보았고
뭔가 같은 듯 다른 듯 슬그머니 편안해졌던 거야.
그러니 또 여행을 가자.
끊임없이 타파스를 시켜 먹고
좁은 유럽 골목에서 렌트한 차를 긁어먹자.
하루쯤은 와인이랑 맥주에 취해서 넷플릭스를 보며 소파에서 잠들기도 하고
문이 열리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에어비앤비 문이 열리지 않아 끙끙대다가
서로 가져온 책을 바꿔 읽으며
포근한 여행지의 밤을 반겨보자.
네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걸 극히 혐오하지만,
내 사진 중 맘에 드는 사진에는 네가 있는 걸 어떡해.
가장 좋은 사진을 나 혼자만 봐야 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너의 뒷모습 한 장 올려보는 걸 용서해 주길 바라.
아마도 이 편지는 너에게 붙이지 못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