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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28. 2024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방콕에서 만난 그녀

우리가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 태국에 있으면서

친구를 만들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나는 구매자 너는 판매자

그냥 그 정도의 관계가 적당하지 않을까?

나의 여행은 무척이나 짧았고

너에게 손님은 하루에도 수십 명 그 이상일테니.


                          ***


방콕에 오면 꼭 가야 한다는 짜뚜짝 시장을 갔다.

아침 일찍 조식을 든든히 챙겨 먹고

카메라와 여분의 필름을 가방에 넣고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생수를 한병 꺼내 들었다.

아침 일찍이라고 해도 해는 벌써 중천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고,

그 사람들만 따라가면 시장이겠거니 했다.


친구는 이사 갈 집에 둘 인테리어 소품

나는 코끼리 바지와 소소한 기념품

몇 안 되는 아이템들을 금방 손에 넣고

엄마가 이야기한 짝퉁 가방이라던가

왠지 태국스러운 예쁜 것들을 맘껏 구경하리라는

별것 없는 계획을 신나게 세웠다.


여기로 가면 될 것 같아.

군말 없이 쫓아오는 친구를 데리고

같은 물건을 파는 집을 세 번째 지나치면서

그제야 그 구역만 세 바퀴째 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게와 가게는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늘 사이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푹푹 찌는 더위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짜뚜짝 시장스럽지 않게

화려한 듯 은은한 고급져 보이는 원피스들을 발견했다.

물건 값도 옆 가게 코끼리 바지보다 몇 배 비쌌고

보드라운 소재에 금색사가 어깨에 수 놓여있었다.

어머 이거 이쁘지 않아

감탄사를 내뱉으며 키가 큰 너는 긴 원피스를

키가 짧은 나는 블라우스를 펼쳐보며 유난을 떨었다.


그러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크고 속삭이듯 말하는 직원과 마주쳤다.

디자인당 다섯벌밖에 만들지 않는다는 이야기

시내에 매장이 있다는 이야기

자기 동생과 친구와 함께하는 사업이라는 이야기

뭔가 열심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

다시 말해달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작은 내 몸집에

예쁜 원피스는 어깨도 품도 컸다.

실망하고 돌아서려는데,

괜찮다면 수선하거나 새로 만들어주겠다는 이야기에

그래? 라며 옷을 받을 호텔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는

그 직원이 이야기한 시내 매장을 찾아갔고

오전엔 짜뚜짝, 저녁엔 시내 매장을 지키던 직원은

길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고 놀라듯

나를 알아보고는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어디서 왔는지, 나도 한국을 좋아한다,

그래서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그저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Do you know BTS? Bulgogi? Kimchi?"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게 다인 줄 알았지.

수선된 원피스만 받으면 다 끝나는 줄 알았지.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생은 엉뚱한 원피스를 보내줬고

왓츠앱으로 부랴부랴 그 사실을 알려줬고

또 부랴부랴 새로운 원피스를 배달해 줬고

얼른 결제해주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날부터 앱서비스 점검이라

QR 코드 결제가 안되었고


결국 주문한 원피스를 가지고

값을 지불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기 전

한국에 가서 어떻게든 결제를 하겠다고

그러자 너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안전한 여행 하라고  

메신저가 뜨거워지도록 이야기했다.


BTS와 Bulgogi와 Kimchi를 욕보일 수는 없으니까

한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어찌 됐든 결제하기.

태국에서 먹은 것들이 잔뜩 체해버려

배에는 가스가 차고 머리는 멍해지고

이러다 국제 도둑 되겠네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만사를 제쳐두고 결제하기에 몰두했다.

Paypal도 깔아보고

QR페이도 다시 시도해 보고

Visa 결제도 다시 해보고

그러다 어찌어찌 결제하고 나니

하아 이렇게 편안할 수가.


                          ***


짧은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어 옷장을 정리했다.

여름옷들을 정리하고

가을 겨울 니트들을 꺼내 걸고 있는데

그때 그 하늘색 화려한 원피스가

옷걸이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눈을 사로잡았던 그 원피스는

난리 치며 샀던 그 원피스는

정작 한국에서는 한 번도 입어보질 못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 나눈 왓츠앱을 열어서

다음에 방콕 오면 연락해라던가

한국에 대해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이야기해 같은

메시지들을 다시 보았다.


여행이 끝나고 QR pay나 Grab 택시앱은 삭제했지만

혹시 그녀가 진짜 한국에 여행 올까 봐

그래서 맛집 소개 좀 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낼까 봐

그 메신저 앱은 삭제하지 못하고 두었었다.


뜨거운 여름 짜뚜짝에서 만난 그녀는

오늘도 나 같은 여행객에게

한 디자인에 다섯벌밖에 만들지 않고

수선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어쩌면 한국에 여행 왔었는데

기어가는 목소리만큼 용기도 작아져

메시지도 보내지 않고 조용히 돌아간 건 아닐까?


그게 뭐 친구야?

라고 누군가는 반문하겠지만,

그녀의 동그란 눈이,

작은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던 커다란 입이,

가게를 지키다 우리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던 표정이,

결제 걱정하지 말고 편안한 여행하라는 그녀의 말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 건

나는 구매자 너는 판매자였지만,

아마도 한번 더 만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 아닐까.


이젠 사소해져 버린 기억에

별난 의미를 부여하며

그 원피스를 차곡차곡 접어

그녀와 함께 옷장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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