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토지>를 보다가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니
한 해 동안 나는 뭘 했고 이루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단체 카톡방에서는 아직 100일이 남았으니 으쌰으쌰
하자는 메시지가 오가기도 했고,
그 에너지를 조금 얻어와
연초에 세웠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을
용기 내어 돌아보았다.
꾸준히 운동하기, 영어공부하기와 같은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목표에 넣었을 뻔한 것들과
박경리 <토지> 완독 하기, 출판작가되기 같은
무시무시한 목표도 있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쉽지 않은 목표라는 걸 알지만
깃털같이 가벼운 가능성에라도
내 전부를 걸어 태워보고 싶었던
사십 대의 열정이었다.
일부는 남은 두 달 내에는 턱도 없을 것 같지만,
운동이나 완독 하기 같은 목표는 하기 나름이니
앞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한 걸음씩 내딛듯
나아가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토지>를 다시 꺼내왔다.
지독한 병렬독서와 책 과소비 습관으로
<토지>는 어느새 뒤편으로 미뤄놨었다.
책갈피가 가리키는 곳을 열어 다시 보니
서희는 간도에 정착했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쌀쌀해지는 요즘 날씨와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느껴지는 문장의 힘.
맞아! 내가 이 문장에 홀려 밤을 새워서 읽었었지.
박경리 작가의 문장은 따뜻하고 정겹다가도
뺨을 스치는 바람에도 베일 듯
여전히 날카롭고 차갑게 아름답기도 했다.
인물들은 괴롭고 억울하고 답답했다.
매일 묵묵히 쌓아 올린 그들의 일상은
켜켜이 한이 서려 안타까웠다.
어처구니없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끈질기게 살아내어 한발 한발 내딛는다.
잘 이겨내리라는 믿음과 응원이 생긴다.
옆에서 입김을 부는 것처럼
생생히 살아 있는 인물들의 대화를 보다 보니,
올해 초 시립미술관에서 본
구본창 선생님의 작품이 생각났다.
같은 듯 다른 듯 빛바랜 군상 안에
사실은 생생하게 살아있었을 그들의 삶을 그려본다.
조각난 그림자 형상이 뒤죽박죽이지만
그 안에 내 모습을 상상하고 퍼즐 맞추기 해볼 수 있다.
계곡과 바다 같은 물 안의 세계는
밖에서 보기에 흐릿하고 단조롭고 뭉뚱그려 있지만,
기꺼이 몸을 집어넣어 다가갔을 땐
자갈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었다.
그건 박경리 작가의 책을 읽으며 드는 기분과 같았다.
박경리 작가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교과서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역사에
깊숙이 몸을 담그게 된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생명력 넘치는 인물 옆에서
같이 호흡하고 일상을 살게 한다.
지금의 삶을 감사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