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한강작가의 소설은 시 같다고 생각했다.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피가 난무한 꿈도 폭력적인 그날의 식사 장면이 나왔지만 그 앞뒤로 흐르는 차분한 정서와 섬세한 묘사 같은 것들이 소설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건 흡사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봤을 때와 조금 비슷했다. 피가 낭자한 하얀 살결이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석고상에 빨간 페인트를 뿌려둔 것 같지만, 그것을 먹고자 입을 벌린 사투르누스의 흰자 가득 희번덕거리는 눈을 보았을 때의 공포, 그리고 호기심, 그림 전면에 뿜어져 나오는 어둠이 만들어내는 묘한 아름다움이 생각났다. 혹은 성모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 조각과도 비슷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근육질의 몸과 그것을 안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젊은 여자의 얼굴, 슬픔보다 고요가 느껴지는 표정.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 오히려 아름다운 조각에 묘한 흥분감 같은 것이 있었고, 이러한 감각이 한강 작가의 책에서 느꼈었다.
그 감각은 <소년이 온다>에서 나오는 섬세한 묘사로 더 극대화되었다. 소설을 쓴 시점은 모르겠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그렇게 점진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한강 작가의 묘사가 더욱 섬세해지고 냉정해지고 깊어지고 그래서 아름다워졌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읽어내는 내 눈이 더욱 차분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보며 폭발했다. 책을 다 읽자마자 친구에게 "한강작가의 멋진 문장력과 묘사가 폭발하는 책 같아요 아주 멋있어요. 꼭 읽어보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 책은 4.3 사건을 겪은 인선의 어머니의 이야기, 그 흔적을 따라가는 인선과 그 이야기를 듣는 경하의 이야기이다. 나는 4.3 사건의 존재도 모르는 채로 오래전 제주도를 놀러 갔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탁 트인 땅을 보고 싶다는 친구말에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을 찾았고, 올레길을 따라 셋알오름까지 발걸음을 옮겼었다. 거칠 것 없는 제주바람이 머리카락을 거세게 흩날리는 비행장에서 탁 트인 해방감을 느끼기보다는 일제의 격납고와 공항건설에 동원되었을 제주도민들의 고난의 흔적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졌었다. 그 답답한 가슴은 셋알오름에 가면서 무거운 돌덩이에 눌리다 못해 찢어졌었다. 일제시절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을 경찰과 군인의 잔존들이 빨갱이를 진압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학살한 현장이었다. 겨우 50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의 작은 땅덩어리 안에 사는 나는 어떻게 이 사건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까? 대입과 상관없는 근현대 역사라서 교과서에 있었지만 못 본 것일까? 아니면 역사는 외워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라 치부하고 외면했기 때문일까?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이토록 무자비하게 빼앗아놓고, 우리는 어떻게 그곳에 신혼여행을 가고 노란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고 바다를 보며 회를 먹을 수가 있었을까?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성산일출봉의 일출이 그때 끌려 나온 도민들에게는 끔찍한 죽음의 시간이라는 걸 우리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찰박거리는 파도에 숨어있다 드러내는 초록색 동그란 이끼들이 그때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그저 아름다운 윤슬을 드러내는 그곳에서 나는 해맑게 그분들의 친척이거나 후손일 수도 있는 해녀분이 만들어주신 해산물 한 접시를 손에 들고 즐거워했었다.
몰랐다.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모르는 것도 잘못한 것이다. 그때 그 제주여행을 기점으로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끔찍하고 두려워서 더는 깊이 있게 찾아보지 못했다. 감정은 있지만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일 내 가족, 내 친구의 일이었다면 가슴에 생채기가 나더라도 더 찾아봤을 것이다. 왜 그랬는지, 어딘가에 살아있는지, 죽었다면 그 주검을 거둘 수 있을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강 건너 불이었고, 다시 서울에 돌아오자 기억은 흐려졌고, 주어진 하루를 그저 안락하게 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서 한강 작가가 에필로그에 남긴 말이 조금 이해되었다. '이것이 지극히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인선 어머니의 그날 죽어버린 가족들과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오빠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은 마을이 불타버리고 끔찍한 그날 살생의 흔적이 생생한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 관절염이 생겨 이동이 힘든 때에도 오빠의 흔적을 찾아 경산 코발트 광산을 찾게 하고 평생을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죽기 직전까지 찾아 헤매게 한다. 그 사랑은 인선을 향하고 인선을 무겁게 하고 인선마저 그 흔적을 잇게 만든다. 한편 인선 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특별히 애정하던 막내 동생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아마도 일출이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사살당했을 테고 흔적도 없이 물고기밥이 되었을 것이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덜덜거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아기였던 동생의 흔적을 찾고 그 동생을 품에 안았던 손과 가슴의 기억으로 겨우 몇 년을 살아가다 결국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인선은 경하의 꿈 이야기를 따라 2미터가 넘는 통나무를 마련하고 그것들을 세울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 나무에 먹칠을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를 혼자 시작한다. 그 프로젝트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저 유해들에게 무덤을 만들어주고 묘비를 세워주는 일일 것이다. 경하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며 프로젝트 중단을 이야기하지만, 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없는 인선은 어머니의 아버지의 생전 의지를 이어 그들에게 무덤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삶의 마지막을 매듭지어 끝나지 않을 생과 사의 경계를 지어주는 것. 반면에 인선의 이야기로 글을 써서 책을 낸 작가 경하는 그날 이후 악몽에 시달리다 자살을 준비한다. 제대로 된 유서를 적기 위해 자살을 매일 미루던 경하는 인선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그리고 제주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1부는 현재형의 문장으로 경하의 여정을 따라간다. 현재형의 문장은 실시간으로 경하가 바라보는 것, 겪는 것을 함께 느끼게 해 주었다. 그녀와 함께 편두통과 구역질을 느끼기도, 차가운 눈밭을 느끼기도, 미끄러져 죽음인지 삶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곳의 분위기를 함께 느꼈다. 2부에서는 현재형과 과거형의 문장이 섞인 상태로 경하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녀의 기억인지 상상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것과 맞물려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집으로 돌아오고 죽었을 앵무새 아마가 푸덕거리며 살아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선은 경하에게 엄마와 아빠가 살아왔던 이야기, 삼촌을 그리고 아기인 채 죽은 고모를 찾던 그들의 이야기를 그간 찾아낸 자료들과 함께 건넨다. 경하는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눈에 젖은 손발과 생채기가 나서 눈인지 피인지 범벅이 된 얼굴로 인선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고 프로젝트가 진행될 그곳을 함께 찾아간다. 사실 따뜻한 콩죽을 먹고 몸을 데우고 싶지만, 사진을 보는 것도 그곳을 힘겹게 찾아가는 것도 다 미루고 싶어 했지만, 결국 고통을 겪고 인내하고 그곳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곳, 프로젝트에서 무덤이 될 그 눈밭에 둘은 드러눕고, 경하는 가지고 간 성냥으로 불꽃을 만들어낸다. 그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강렬한 생애의 욕망, 결심, 사랑. 마지막 성냥이 꺾이지만, 부러진 데를 다시 쥐어 기어코 불꽃을 만들어낸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죽음과 삶, 죽었을지 살았을지 단정 지을 수 없는 엄마의 오빠, 시야가 나뉘어 양쪽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앵무새 같은 공존하는 상반된 두 가지 상태는 이 소설의 전체를 흐르는 분위기가 된다. 이 이야기가 경하의 실제 경험인지 꿈인지, 경하와 인선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앵무새 아마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있는 것 같은 흡사 양자역학 같은 분위기가 이 소설 전체에 흐르며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한강 작가 특유의 시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뭐라 단정 짓지 못하는 것에서 불편한 감정, 안정적이게 되고 싶은 묘한 불안감 같은 것들을 소설 읽는 내내 함께 가져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는 그 불안감을 겨우 소설 읽는 동안만 잠시 그리고 옅게 겪겠지만, 4.3 사건의 피해자와 후손들은 영원히 겪을 것이다. 그건 죽고 나서도 벗어버릴 수 없는 분열이고 고통이다. 그러니 생과 사가 넘나드는 사건에서 피해자는 그리고 유가족은 해결을 위한 진상규명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된다. 그건 유해를 찾고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일 거다. 무덤을 만들고 봉분을 올리고 묘비를 세워주고 싶은 마음일 테다. 그리고 생애에 걸쳐 그렇게 만드는 동력은 어쩌면 사랑일 것이다. 차가운 눈밭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경하의 손에서 마지막에 불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
책 마지막에 인선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자, 경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생각한다.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그 마음은 사랑이고 유가족의 마음이다. 그리고 아마도 작별하지 않겠다는 마음일 거다. 죽지 않고, 하지만 죽어서도, 어쩌면 죽음마저도 작별하지 않겠다는 마음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