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여행합니다

3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놉니다 (2편)

by 니나

회사를 퇴사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이제 여유가 되니 그간 못 보던 사람들을 만나야지 라는 마음에 '밥 먹자, 커피 마시자, 보고 싶다'라는 말을 들으면 냉큼 약속을 잡고 캘린더에 표시한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강남이나 역삼 쪽 직장인이어서, 은평구에 사는 나는 한번 나가면 두 개 이상 약속을 잡고 반나절 이상 강남쪽 길을 돌아다니곤 했다. 약속과 약속 사이 빈 시간에는 잠시 있을 카페를 찾아 돌아다녔고, 어떤 날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손이 덜덜덜 떨리고 오금마저 저린 거 같아 뭔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차를 마셔도 대체로 카페인이 있을 때가 많고, 카모마일이나 페퍼민트 같은 허브차는 영 나랑 궁합이 맞지 않았다. 과일차나 주스류는 너무 달아서 먹으면서도 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엔가 나는 자연스럽게 서점들을 기웃거렸다. 더운 날에는 에어컨이, 추운 날에는 히터가 적당히 틀어져 쾌적하고, 여기저기 볼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있고, 운이 좋을 때는 책상 빈자리에 앉아 산더미 같이 쌓인 책 중 하나를 선택해서 탐독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약속과 약속 사이 어딘가에 있는 큰 책방, 동네 책방, 독립 서점들을 찾아 헤맸는데, 몸은 편하면서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으니, 고맙고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그렇다고 내가 배은망덕하게 쾌적한 공기와 장소에서 공짜 책만 쏙 빼먹고 오는 건 아니다. 집 책장 절반은 아직 안 읽은 책이거나 읽다 만 책일 정도로 책 모으는 욕심은 남에 뒤지지 않는 편이라, 맘에 드는 책을 한 권쯤 발견하고 사 오게 된다. 커피와 빵 사 먹을 값이면 책 한 권 정도 살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적고, 내 책장 어딘가를 늠름하게 채워주니 손에 남는 것도 있고,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세계가 나의 세계로 들어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일석삼조인 이런 도심 속 오아시스들이 마구마구 생겨나면 좋겠다. 이런 곳이 또 어디 없나 한참을 두리번거릴 게 아니라 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해서 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강남에서 점심을 먹고 압구정에서 저녁 약속이 있는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근처에 갈만한 책방이 있는지 지도 앱을 켜서 찾던 중,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어떤 곳인지 잠시 서서 리뷰를 뒤적거리다 보니 1층은 뭔가를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곳인데, 2층은 쿠킹과 관련된 책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대카드가 있다면 2층 무료입장이라고 하니, 그래 오늘은 이곳 당첨이다~ 하고 현대카드가 지갑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산 생수가 손에 있어서 뭔가를 먹거나 마실 생각은 없었다. 1층에서 출입을 확인받은 후, 2층으로 이동하니 조용하고 쾌적하면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사이즈의 도서관이 짜잔 나타났다. '와~ 이제 무료인 거야?' 요리 전문 서적 외에도 음식을 주제로 한 에세이와 잡지 들도 있어 누구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도서관 중앙에는 요리에 쓰이는 허브 향을 맡아볼 수 있는 장소가 있었는데, 맘에 든다면 레시피가 적힌 종이를 가질 수도 있었다. 나는 책갈피로 좋겠다 싶어 맘에 드는 허브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한 장 가져왔다. 그리고 근처 책상에 앉아 프랑스인 남편과 함께 내추럴와인 농장과 공장을 운영하시는 에세이를 읽었다. 신이현 소설가의 '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이었다. 프랑스에서 번듯한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농장을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알아보던 중, 그럴 거면 한국에 가자는 아내의 말에 한국에서 농장을 알아보고 땅을 일구고, 포도와 풀과 나무와 벌레 들과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몇 달 안에 결과가 나오는 일도 아니고, 몇 년이 지나서 얼마나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 상황이라 미래가 걱정되지만, 그래도 남편의 신념에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농장을 가꾸며 노동의 재미를 찾고 자연의 신비를 목도하고 조금 밝은 미래를 꿈꿔보는 이야기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써야겠다'라고 결심한 나와 왠지 비슷하여 마음이 가는 책이었다. 그 책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메모를 끄적였고, 한가한 2층 도서관에서 혼자 울컥했었다.

'나는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제 이 길에 첫발을 디뎠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꿈을 꾼다는 기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 번은 강남구청역 주변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었는데 한 시간 정도 틈이 생겼다. 마찬가지로 또 핸드폰을 꺼내서 근처 서점이 없나 검색해보니, 책과얽힘이라는 이름의 과학기술과 인문 사회 전문 서점이 있었다. '가만…. 과학이면 과학이고 인문이면 인문인데, 그 둘이 같이 있다니 재미있네?' 이과와 문과가 같이 있는 모습 같았고, 그게 전공은 이과인데 하는 일은 문과인 나 같아서 들어가기 전부터 맘에 들기 시작했다. 좀 작은 서점이었지만, 꽤 군침이 흐르는 책들이 많았다. 당시 나는 원래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찾아 재취업을 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 좀 더 탐색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터라, 몰입과 탐색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들도 좋아요'라고 여러 가지를 추천해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책들을 살 걸 그랬다. 내가 산 책은 혼란만 더 가중했고 어느 한쪽으로 생각이 정리되진 않아, 여전히 다 읽지도 못했다. 잠시 시간을 보낼 겸 책을 들고 중간에 있던 테이블에 앉았는데, 그날 저녁 북클럽 모임이 있어 사람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얼른 일어서기에는 약속 시간이 남아 어쩌지 망설이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는데, 그러다 북클럽 멤버들과 먹으려고 싸 오신 떡을 하나 주셔서 얻어먹었다. 동네 아지트 같은 이곳이 낯설면서도 왠지 맘에 들어서 자주 오고 싶었다. 그래서 페이스북 페이지도 팔로우하고 이어 Chat GPT 북토크를 보러 다시 방문했었다.


가로수길에서 저녁 술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이곳에는 알라딘 중고 서적 책방이 있다. 알라딘은 여기저기 지점이 많아 꼭 가로수길이 아니더라도 근처 볼일이 있으면 종종 들르는 곳이었다. 이날은 모비딕을 중고책으로 사려고 아예 작정하고 갔었다. 왠지 다 읽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완독을 해볼 작정이었다. 못 읽을 것 같다는 걱정부터 들다 보니 새 책으로는 사기 싫었고 중고책을 구매해야지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인기 도서였는지 아쉽게도 그날 모비딕은 없었다. 대신 여기저기 책장의 책들을 둘러보며 구경하는데, 중고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특상급의 새 책들이 많았다. 상태 좋은 새 책 같은 책을 중고가에 사니 횡재했다는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정말 잘 안 읽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 책장 속에서 나는 가수이자 작가인 요조의 '아무튼 떡볶이'를 발견했는데, 한쪽에 있는 책상에 앉아 침을 삼키며 절반을 후루룩 읽어버렸다. 나머지는 다른 날 집에서 읽었는데, 작가의 상념들이 떡볶이와 함께 에피소드와 아무튼 잘 버무려져서 맛깔나게 그려져 있었다. 완독하고 나니 늦은 밤이었지만 결국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고야 말았다. 에세이의 참맛을 슬슬 알아가게 된 시점이었다. 참, 앞으로 중고 서점에서는 외국책을 사려고 한다. 중고책은 사더라도 작가에게 인세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뭐 재미난 거 없을까? 친구와 궁리하다 고전을 읽어보자는 생각에 소전서림에서 진행하는 독서회를 함께 신청했었다. 장편 고전이라면 부담스러웠겠지만, 카프카의 '변신',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같은 단편 들이어서 다행이었다. 다만 참가비 외에도 도서관 이용 금액이 연간 10만원이라 결제하려는 순간 조금 망설여졌다. 그동안 발견해서 찾아가던 오아시스들은 책값 외 입장하는 값은 무료였다 보니, 내 손에 책이 잡힌 것도 아닌데 먼저 돈부터 낸다는 사실이 영 마뜩잖았다. 동네 구립도서관은 무료인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오픈 초기부터 공간이 좋다는 소문은 들었던 참이라 용기 내어 결제했다. 이렇게 돈을 내면 더 자주 가서 더 많은 책을 보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운동하기 위해 헬스장을 등록하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유료 결제하고 입장해 보니 짐도 맡길 수 있고 화장실도 쾌적하고 곳곳에 숨은 자리들이 있어 마음 편하게 자세를 바꿔가며 오래 앉아 책을 뒤적거릴 수 있었다. 사서 읽기 싫은 책들은 이곳에서 찾아 읽었고, 가끔은 책보다도 화장실과 잠깐의 휴식을 위해 들르기도 했다. 나는 연회비를 낸 정회원이니 당당하게 QR코드를 찍고 말이다.


처음에는 길 위에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 카페에서 음료수 먹는 것에 질려버려, 대안으로 찾아다녔었다. 그러다 서울 여행자가 잠시 쉴 수 있는 도심 속 오아시스들이 고마웠고, 이런 좋은 곳을 직장인일 때는 내가 몰랐다니 안타까워 탄식했다. 어쩌다 처음 발을 디딘 곳이 서점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른 흥미로운 곳들도 많았을 텐데 그게 서점이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덕분에 나는 책을 좀 더 자주 접했고, 평소라면 시작하지 않았을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를 보며 작가의 세계와 생각을 만났고, 과학책과 실용 서적을 보며 세상 살아가는 정보를 획득했고, 고전을 보며 문장을 읽어내는 힘을 기르고 시대를 관통하는 사유를 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글쓰기로 더 강하게 몰고 갔다. 회사라는 곳에서 내 시간과 체력과 영혼을 돈과 자존심으로 바꿔 살아가다 보니 결국엔 모든 것을 소모해 버리고 비쩍 말라 그곳을 나왔었다.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며 조리개에 물을 담아 조심스레 뿌려보듯, 나는 나에게 물을 주고 있다. 오아시스를 만나 목을 축이고 휴식을 취하고 눈 앞에 펼쳐진 뜨거운 사막을 다시 건널 용기를 얻듯, 나는 오늘도 이 도심 속 오아시스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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