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하다

3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놉니다 (1편)

by 니나

지난해 11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받고 다시 회사를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니, 갑자기 내 드롭박스가 사라졌다. 회사에서는 원활한 협업과 파일 공유를 위해 드롭박스라는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도록 독려했었고, 나는 회사와 재택에서 각각 다른 컴퓨터를 썼었기에, 이 드롭박스를 말 그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사용했었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세상 어디서든 내가 하던 일을 연결해서 할 수 있었다. 사소한 사진 한 장부터 중요한 리포트나 광고주 미팅 자료까지도 모조리 그 드롭박스에 올려두고 수정하고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드롭박스가 갑자기 한마디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하던 일을 연결 지어서 하지 못하게 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4년 반 동안 했던 내 모든 일들, 제안서, 보고서, 발표 자료는 물론, 회사 사람들과 함께 했던 크고 작은 이벤트, 생일과 입사일, 회식 같은 자리에서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 자료, 심지어 출장과 여행에서의 추억까지도 모두 정말 모조리 싹 없어진 것이다. 내 아이디는 없는 계정이라며 문제가 있다면 관리자에게 연락하라는 바보 같은 경고창만 계속 무심하게 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정리해고 대상자라서 그런 거라면 사내망 접속부터 막아야지. 컴퓨터도 사내망도 메일도 문제없이 다 잘 쓸 수 있는데, 드롭박스만 이럴 순 없어. 뭔가 오류 같은 걸 거야.’라며 IT Desk (아이티 데스크, 회사 업무에 필요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지원을 담당하는 곳)을 찾았다. 담당자는 나와 함께 며칠을 끙끙대며 방법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새 계정을 생성했을 뿐, 나의 4년 반 동안의 기록은 영영 찾을 수가 없었다.


파일이 사라졌다고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한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일한 동료의 머릿속에, 그 사람들의 컴퓨터 안에, 사내망의 게시물에서 내 흔적들은 충분히 찾을 수 있었고, 내 업무의 성과는 그간 나의 매출 숫자와 광고주의 비즈니스 성장에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내가 이직하거나 창업할 때, 내가 했던 일을 돌아보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면, 내가 했던 일들을 정리하고 자료로 증명해야 한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모든 건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고, 그나마도 오래된 것은 희미했다. 회사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한동안 패닉이었다. 그러나 모두 다 잃어버렸더니, 어디서부터 뭘 잃어버렸는지 감조차 오지 않아, 없어져서 아쉽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허망했다. 필요한 자료 한두 개가 사라지면, 그래서 뭘 잃어버린 건지 내가 안다면, 상실의 종류와 크기가 구체적이어서 화라도 날 텐데. 이건 뭐 밑도 끝도 없이 통째로 사라진 거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아쉬운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4년 반의 기억이 날아가 버린 것처럼 멍했다.


이런 일은 또 있었다. 회사의 퇴직 동의서에 사인하고 모든 업무를 정리한 후, 발리로 떠났던 그때였다. 다이빙하며 찍은 영상과 사진 들을 모두 담아두기에 핸드폰 용량이 부족해서, 아이클라우드 멤버십을 업그레이드하고 동기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뭘 지우는 걸 잘하지 못한다. 혹시 나중에 필요하면 어떡하지?라는 미련함과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애정은 넘치면서 그때그때 정리하는 성실함은 가지지 못하다 보니, 파일은 늘 넘치도록 많고 저장 용량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 아이클라우드도 이미 유료로 쓰고 있었지만, 이번에 더 큰 것으로 멤버십을 업그레이드했고, 확인하고 지우는 수고로움 대신 매월 돈을 더 내기로 결정했었다.


그 밤 친구는 곤히 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친구를 행여 깨울까 봐 구석진 곳에서 작은 핸드폰 빛에 의지하며 메모리카드의 영상들을 백업하고 있었다. 백업과 동기화가 끝나자 여기저기 흩어진 내 연락처가 보였다. 핸드폰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둔 내 개인 연락처부터 회사에 다니며 알게 된 광고주, 파트너사 등 업계 관계자들의 연락처 들이었다. 이왕 정리하는 거, 이 연락처들도 한데 모아 저장해두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 맞을 거야 하며, ‘동기화’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내 연락처는 그 순간 모두 다 삭제되었다.


‘악!’ 친구가 깰까 봐 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뭔 짓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돼 핸드폰 화면을 다시 봤다. 뒤로 돌아가기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한 짓을 깨닫고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안돼!’


밤새 동기화로 삭제된 연락처를 되돌리는 방법이 없을지 찾아봤다. 애플 고객센터는 물론 각종 블로그와 지식인을 찾아보고, 남자친구에게도 연락해서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방법은 없었다. 두통이 갑자기 찾아왔다. 한쪽 머리가 지끈하더니 찡~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대략 팔백개 정도의 연락처가 다 사라졌다. 나는 4년 반의 회사생활뿐 아니라 20년 세월의 인맥도 그날 다 날려버렸다.


드롭박스야 회사의 조치였으니 부당하다 억울하다를 떠나 내 잘못은 아니니까 빨리 포기했었다. 그런데 연락처를 날려버린 것은 백 퍼센트 내 실수였다. 그 점이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나는 왜 그랬던 것일까를 그날 밤부터 며칠 동안을 자책하며 실수를 괴로워했다. 클라우드를 처음 쓰는 것도 아니었고, 동기화를 잘못하면 다 삭제되는 것을 모르던 것도 아니면서, 그날 밤은 정말 왜 그랬을까.


아무튼 그렇게 나는 리셋되었다. 회사에서 잘려 반강제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회사에서 한 일과 성인이 된 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의 연락처까지 모두 깔끔하게 클릭 한 번으로 날려버리고, 포맷한 컴퓨터처럼 텅 비어버렸다. 뒤로가기 버튼은 없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자료도 없지만, 연락처도 없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한편으론 뭐든 정리할 때면 모조리 꺼내놓고 새로 정리하는 내 원래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나는 무언가를 정리할 때는 그 공간에 있는 모든 물건을 싹 꺼내서 비워낸 후, 그 공간의 필요나 역할을 재정의하고, 그에 맞는 것들을 찾아 하나씩 하나씩 채워 넣는 식이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필요 없는 파일을 솎아내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모두 외장하드로 옮기고 포맷한 후, 파티션이나 폴더를 새로 만들고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옮기는 식이다. 그런 습관으로 살다 보니, 내 인생도 그렇게 정리하게 되어버렸나 보다. 오히려 다행이다. 싹 비웠으니 이제 새로운 것으로 하나씩 하나씩 잘 채워봐야지. 인생도, 일도, 사람도.


keyword
이전 15화아직 덜 쉬었네, 좀 더 쉬어도 돼